쇠락하는 양반 댁의 맏딸로 태어나서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을 익혔는데
일도 많은 종갓집 맏며느리 낙인찍혀
열 여덟살 꽃 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한데
밥 짓고 국도 끓여 두번 세번 차려내고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한 치 두 치 늘어나서 무명 한필 말아지면
하품 한 번 마음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매정스런 바늘 끝이 손톱 밑을 파고들면
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막내녀석 세워 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
정월 한식 단오 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고추 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이 내 몸이 죽어져야 이 고생이 끝나려나?
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 하니 넓은 집에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탁했는지
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 땐
손톱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꿈에라도 그런 것은 상상조차 아니했고,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윤달 든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놓고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까탈 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 살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 마라!
원도 한도 난 모른다, 이 세상에 미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