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방과 광복 당시
1945 9월 9일,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중앙청에서 진행된 항복 조인식에서 아베 노부유키 준장이 미군이 보는 앞에서 항복 서명을 하고 있다.
아베 노부유키 준장은 항복 후 보름이 지나서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입력 : 2015.08.14 10:18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미 제24군단의 존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 제독 등 미군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다.
이미 1주일 전 동경만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이 있었지만,
이날 항복문서의 효력은 38선 이남에만 적용된다는 것이 달랐다.
1945 9월, 미보병 7사단 32연대가 중앙청 앞에 있는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있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 조인식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후,
총독부 앞뜰에서는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뒤에도
23일간이나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한반도의 통치권이 일본 제국주의의 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1945년 9월, 한국 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한국에 진주한
미 보병7사단 32연대가 서울역에 도착해 서울로 들어오고 있다.
1945년, 서울역앞 미군 환영 시민 인파의 모습.
1945년 9월, 부녀자들이 성조기를 들고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진주한 미 연합군 환영 행진을 하고 있다.
1945년 9월, 미군 군악대가 남대문에서 중앙청으로 행진하고 있다.
1945년 9월 초부터 미군은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미보병 7사단 32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일본군의 모습.
1945년 10월, 미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군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있다.
1945년 10월, 부산항에서 무장해제된 일본군이 미군에 의해 이동하고 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항에서 긴 행렬을 지어 배를 기다린 일본인들을 태운 배가 조선을 떠나고 있다.
부산항의 일본군 철 수선 승천인원 2천명이지만 4천명씩 태워 1일 1회 날랐다.
일제가 이 땅에서 사라진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민족은 충분히 기뻤을 뿐이다.
38도 선 이북이든 이남이든 기쁨의 강도는 같았다.
우리 민족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고 일본군을 내몰고 대신 진주해 온 해방군인 미군을 환영했다.
1945년, 광복을 축하하는 꽃으로 장식된 전차의 모습.
1945년, 서울역쪽에서 본 당시의 남대문 모습.
1945년, 서울신촌 이화여대 입구 아현동에서 한 여성의 모습.
1945년, 중앙청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식. 주요 정부인사들 위로 경계를 하고 있는 미군 호위병이 눈길을 끈다.
1945년, 신탁통치 반대 집회 모습. 신탁통치는 유엔 감독하에 자격을 갖춘 국가가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1945년, 개성을 출발한 월남하는 피난민들이 대구행 기차를 타고 있다.
8월 15일은 광복(光復)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국내적으로는 광복 70주년이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제2차대전 종전(終戰) 70주년이기도 하다.
우리의 광복이 세계 제2차대전이라는 전쟁의 결과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y
광복의 날과 그 이후의 날들에 이어진 기쁨의 축제는 당시 사진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훗날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사진들 속에 고스란히 기록으로 녹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당시 사진 속에서 우리는 해방 공간의 역사를 이끈 인물들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고
사진 속에 박제돼 있는 그때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사진/ 월간조선 1988년 1월호 부록에 게재된 사진으로 미국 육군,해군 국립문서보관서 등에서 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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