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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노년문화예술제 특별상

철산. 케네디 2015. 6. 3. 19:11

2015 한국노년문화예술제

 

 

 

 

 

 

 

 

 

 

  [수필부분 2편] 

 

                          잊을 수 없는 열부(烈夫) 내 친구

                                                                김 종 길

 

 

회장님 노후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는 예순이 지난 후 나를 만날 때 마다, 5년간 봉사모임에 회장을 한 나에게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말이다. 그는 다섯 살 아래이며 성남에서 공무원 통근버스를 타면서 알게 된 30년 친구 신 모 씨다. 나는 그 친구의 막냇동생과 큰 아들의 결혼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는 부인이 평생지병에다 가정형편이 나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진심이었고 확신에 가까운 의지가 있었다. 그 친구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 그는 추석. 명절과 내 생일에는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주어 미안할 정도로 고마웠고 인간적이었다. 그 친구는 평생을 오직 부인에 대한 온갖 정성과 열렬한 사랑으로 살아 온 烈夫였다. 애석하게도 그와 부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80년대 초에 성남에서 서울로 통근하는 공무원들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생활에 힘들게 살고 있었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그 친구는 얼굴에 그늘과 웃음이 동시에 나타나는 묘한 인상이었다. 수시로 모여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모임의 회원들에게 친화력이 남달랐다. 당시 내가 어렵게 통근버스를 유치한 사연을 알고 있기에 유달리 고마워하고,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진심이 실려 있었다.

가끔 술이라도 한잔하는 날이면 형님 같다며 가정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를 알면 알수록 애틋하고 애잔한 마음이 쌓여만 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동대문 인근에서 이발사로 근무했고, 옆집 미장원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단다. 아가씨,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려 방문한 날, 은행지점장인 아버지는 절대로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 이유를 묻자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몇 번을 방문한 결과, 자기 딸은 평생 고질병인 간질병 환자이기에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청천벽력 같았지만, 이미 불같은 열정으로 사랑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그 병을 고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 테니 결혼을 승낙해 달라고 매일 같이 간청한 결과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키웠다. 남들 보기에는 평온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간질병은 현대 의학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병이다. 이를 고치기 위하여 전국의 유명한 병원과 한의사를 다 찾아 다녔단다. 더구나 나이가 들수록 더 발병 빈도가 잦고 심해가기만 했다. 말단 공무원의 박봉에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근 후에도 Two Job으로 포장마차, 야간업소 근무, 야간경비, 건물청소 안 해 본 것이 없단다. 후암동에 살 때는 새벽 4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준비해 놓고 출근하고, 퇴근 후에 남대문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했단다. 텃세 폭력배가 그냥 둘리 없었다. 폭력배 집단과 목숨을 건 한판 싸움에서 회칼을 휘둘러 쌍방폭행으로 경찰서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할 때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 약하고 순한 사람이 부인의 치료비 조달을 위해 처절한 삶의 절박함에, 조직폭력배들과 목숨을 담보로한 혈투를 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존경스럽기까지 했었다. 그 일로 경찰과 조직폭력배들도 그의 가정 사정을 이해하고 포장마차터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후 성남으로 이사를 하고도 Two Job은 계속되었고 남대문 폭력배가 친히 성남까지 방문하여 형님으로 대접했다. 성남의 토착 깡패에게 형님으로 대접하라고 부탁까지 하고 갔다. 포장마차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어 부인의 병원비를 충당하는데 도움이 되었단다. 가끔 이름도 처음 듣는 시골의 유명한 의사와 한약방을 다녀왔다면서 피곤한 기색을 숨김없이 틀어 놓았다.

보다 못한 형제자매들도 이혼을 강권했으나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펄쩍 뛰곤 했단다. 평생을 오직 부인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 가정 살림까지 하면서 살았다. 밖에 있을 때에도 수시로 식구들에게 전화해서 부인의 안부를 묻곤 했었다.

결국 부인은 나이가 많아지자 정신을 놓고 무의식적인 가출에 애를 태우더니, 모 대학 뒷산에서 객사를 한 것이 5년 전 일이었다. 평생을 부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 그 친구가 너무나 애절한 통곡소리에 자기 스스로 혼절하곤 했었다. 그 후 결혼 못한 막내아들마저 교통사고로 3년 전에 잃었다. 이래저래 폭풍처럼 밀려오는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리 만류를 해도 어쩔 수 없이 술에 찌들다 병을 얻었다.

 

2014년 추석에 예쁜 아줌마와 같이 우리 집에 왔어 앞으로 재미있게 잘 살아 보겠다고 언약처럼 하고 갔었다. 평생을 부인을 위해 열부로 희생한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작고한 부인도 이해 할 것이라, 이제 정말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었다. 그러고 한 달 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내가 의지하고 있는 큰 나무에 벼락을 맞은 것 같아 한동안 정신이 몽롱 했었다.

 

요즈음 부부가 온갖 비정상적이고 굴곡진 삶을 살면서도 행복을 누리고 잘 살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매스컴에서 탈선과 위선을 최선이고 진실인양 조장하는 드라마가 넘쳐나고 있다.

그 친구의 진솔한 열부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 있다면 그렇게 선량하고 평생을 부인을 위하여 험한 일 가리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한 그 烈夫, 그렇게 일생을 마치게 해도 되는 것인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아버지는 농부요 마부였다

                                                                  김 종길

 

아저씨 이게 무엇입니까? 일을 하시려면 똑 바로 하셔야지...” 경비실에서 큰 소리가 났다. 30대 후반 아주머니가 아버지 나이 보다 많은 70대 중반의 경비원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 여자는 몇 층 몇 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 분이였다. 승강기 안에서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상대방을 무시하는 뜻한 태도가 내 마음에 벗어 난지 이미 오래되었다. 70여년을 살아온 경험으로 볼 때 성형을 했는지 얼굴은 받쳐주는데 지식이나 과거 경력이 수상해 보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경비원 아저씨는 연신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였다. 그러자 젊은 여자는 더 기세가 등등해 경비원을 몰아세우는 것이 너무나 안쓰러워 나는 자리를 얼른 피하였다. 그분은 내가 잘 아는 초등학교 교장이셨던 분으로 교양과 품위가 있는 분이였다. 아파트단지 옆 놀이터 산바람공원에서 아저씨를 우연히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전교조를 보는 시각이 나와 비슷해서 그분의 경력과 인격을 알게 된지 오래 되었다.

그 분의 품성이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할 분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것을 죄인을 다루듯 큰 소리로 어른을 나무라는 것은 교양 없는 사람이거나 자기과시, 아니면 스트레스를 푸는 비정상적인 소행이 분명해 보였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의와 상식에 어긋나게 어른을 무시하는 언행은 더불어 살아가기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농사철에는 농사일에 매달렸고, 한가한 겨울에는 소달구지에 땔나무 짝을 실고 읍내 시장에 팔아 나와 동생들 월사금은 물론 어려운 농촌살림에 보태었다. 아버지는 6남매의 장남이었고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집 가장이었다. 그리고 올망졸망 6형제 자식까지 키운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러 받는 유산도 별로 없었으니 농사일과 소달구지로 나무장사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나무를 팔로 가는 겨울철 새벽 칼바람에도 5시경에 산골에서 3십리나 되는 읍내까지 먼 길을 소달구지를 몰고 가셨다. 읍내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다니며 까다로운 젊은 아주머니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큰 나무 짝을 좁은 부엌에 들여 놓는 것도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든 어느 날 부엌에 큰 나무 짝을 들여놓다가 값이 좀 나가는 그릇을 떨어뜨려 깨진 것이다. 그 아줌마는 이웃에 시끄러울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깨진 그릇을 변상하라고 난리를 부렸었다. 그릇 값 대신 나무 값을 받지도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단다. 그 길로 팔지 못한 나무 두 짝을 실고 삼십 리 길을 되돌아오면서 주막에 들려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애매한 어머니께 투정을 부리섰다. 그날 이후 2일간이나 두문불출하시고, 달포 간 생업인 소달구지를 보기도 싫다며 내 팽개치셨다. 나무 값보다 그 젊은 여자의 앙칼진 억지와 수모를 참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다.

 

내 고향 시골동네는 김가들의 집성촌이다. 아버지는 가문의 중견어른으로 누구든 도리에 어긋나면 직선적으로 꾸짖고 성격도 급하셨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내가 한 단락을 마자 읽고 나가려고 한두 번 불러도 나가지 않으면, 문을 활짝 열고 내가 보는 책에 낫 끝으로 찍어 마당에 내팽개칠 정도로 성질이 급하셨다.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분명하여 어린이들의 잘못도 호통을 치니 별명이 호랑이 아저씨였다. 골목길에 놀든 아이들도 아버지가 나타나면 호랑이 뜯다하며 피할 정도였다. 그런 분이 젊은 여자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두문불출에다 가정형편과 상관없이 나무장사를 팽개친 것은 당연하였다. 그 여자가 아버지 가슴에 빠지지 않는 못을 박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후 아버지는 남의 가슴에 못 박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소일삼아 하시는 경비원 아저씨도 그 여자의 앙칼진 말이 못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국의 명문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창설자인 하워드 켈리(1858~1943)는 산부인과 분야에 전 세계의 독보적인 의사였다. 그가 고학생으로 가정방문 외판원시절에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방문한 가정에 물 한잔만 달라고 했다. 허기짐이 역역한 그에게 우유 한 컵을 건 내 주었다. 그대가로 돈을 주자 어머님이 친절은 대가를 받지 말라고 했다는 소녀의 말 한마디를 그는 평생 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십 수 년 이 지나 부인이 된 그녀는 불치의 중병에 걸려, 마지막 수단으로 유명한 의사를 초빙하기로 하였다. 초빙된 의사가 하워드 켈리였고, 그는 부인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온갖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 치료한 결과 완쾌 되였다. 세계 최고의 의사, 초빙료 등 엄청난 치료비를 예상하였다. 그러나 배달된 치료비청구서에는 한 잔의 우유로 치료비는 예전에 이미 다 받았습니다. 평생에 짐이었던 우유 값을 지불하였으니 너무나 행복합니다. 완쾌를 축하 합니다라는 감동의 예쁜 카드가 들어 있었다. “친절은 대가를 받으면 안 된다는 그 말 한마디가 불치의 병에서 생명을 살렸고, 허기에 지친 그에게 우유 한잔의 값어치는 수억 원의 치료비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아름다운 말과 친절은 하면 할수록 더 커진 축복의 그릇에 행운이 쌓이는 것이다 

경비원 아저씨를 보면서, 가슴에 못을 박고 사신 호랑이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시 부분 2편]   

 

 

 

우리 어머님

              김 종 길

 

모진 고난 섧은 사연 옷섶에 감싸 안고

한 맺힌 하고픈 말 미소 뒤로 숨기시며

뒤쫓는 가난을 뿌리치기 오십 여년

험한 세상 고생길을 마다 않고 오시느라

꽃같이 곱던 얼굴 세월만큼 주름이네

 

 

밤낮으로 일에 묻혀 가는 세월 모르시고

올망졸망 육 형제를 애지중지 기르시며

일가친척 이웃사랑 내 몸같이 하시드니

한 평생 찌든 고생 자식사랑 한 푸시고

백발에 주름진 얼굴 함박웃음 웃으시네

 

 

산 넘어 시집올 땐 꿈 많은 소녀시절

가난이 한이 되어 일만하신 새댁시절

많은 자식 길러내려 애태우던 중년시절

자식들 출가하니 고독뿐인 노년시절

치마폭 자락마다 숨은 사연 누가 알리

 

 

 

 

   

사 모 곡

            김 종길

 

고향산천 감싸 안던 그 정은 어디 두고

자식위해 빌어 시든 정화수는 어찌하고

훌쩍 떠난 당신 자리 너무나 큰 흔적에

아무리 통곡해도 서러움만 더합니다.

 

여름이면 농사 짖고 겨울이면 베를 짜고

동이 트면 호미질에 달이 뜨면 보리방아

평생을 졸라매신 허리띠는 어찌하고

굽은 허리 못 펴시고 훌훌히 가십니까.

 

나무 때어 밥을 짓고 얼음 깨어 빨래하고

등잔불에 다리미질 밤새운 바느질에

그 흔한 가전제품 쓰시면서 사셨으면

불효자식 한이 되어 울지는 않았지요.

 

가신 곳은 천당이요 사시는 곳 극락이니

이 세상 한이 되신 가난을 물리시고

밤낮 없는 자식 걱정 훌훌히 털어 시고

영생토록 부귀영화 한없이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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