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자국/뿌리를 찾아

김해김씨 유래

철산. 케네디 2012. 1. 25. 19:38

:: 김해김씨(金海金氏)[가락] ::

 

▣ 유래

 

시조 : 김수로왕(金首露王) 이다.

 

가락국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仁川 李氏)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김해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인물

 

경파 (京派)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 51세손)은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김보의 6세손 김영견(金永堅 : 동지중추부사), 김영서(金永瑞 : 현감), 김영정(金永貞 : 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金永純 : 한성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때 명신 김우항(金宇杭)은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사군파 (四君派)

 

사군파에서는 파조인 김익경(金益卿 : 51세손)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李穡), 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게 은둔 생활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추(金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김석(金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 김극희(金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김완(金完 : 학천군 김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우(金宇)의 아들 김여준(金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내어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 일어나 성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의 정문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삼현파 ( 三賢派 )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세조인 김관(金管: 49세손 )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김언유(金彦諭)는 고향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김언유의 아들 김현성(金玄成)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덕승(金德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김예직(金禮直),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김진희(金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극검(金克儉)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김기손(金驥孫) : 문과(文科) 성종13년(1482) 친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유신(金庾信) : 문과(文科) 중종11년(151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명악(金命岳, 1821 辛巳生) : 문과(文科) 철종5년(1854)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세진(金世鎭, 1838 戊戌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경준(金敬濬,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고종23년(1886) 함경도도과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빈(金○,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태종16년(1416) 중시 을과(乙科)

김현성(金玄成, 1542 壬寅生) :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식년시 병과(丙科)

김덕승(金德承,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광해군11년(1619) 별시 을과(乙科)

김상환(金商煥, 1699 己卯生) : 문과(文科) 영조11년(1735) 정시 을과(乙科)

등 모두 128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

* 과거 급제자는 본관이 같고 계통이 다른 본관과 구분이 안된 것이다.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

 

김해(金海)는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일대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良州: 梁山)의 관할로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개칭하여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가 1012년(현종 4)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으나 1018년부터는 의안군(義安郡: 昌原)·함안군(咸安郡)·칠원현(漆原縣: 漆原面)·웅신현(熊神縣: 鎭海)등을 영현으로 삼았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293년(충렬왕 19) 현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김해부(金海府)로 격하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고, 1918년에 좌부면과 우부면이 김해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는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과 통합하여 김해시가 되었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1985년에는 총 892,330가구 3,767,065명,

2000년에는 총 1,295,080가구 4,124,93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 다른 자료에서 따옴

『김해김씨(金海金氏)』


⊙ 연원

▶ 시조 : 김수로왕(金首露王)
‘고려사’에 신라 유리왕 18년 가락(駕洛)의 아도(我刀) · 여도(汝刀) · 피도(彼刀) · 오도(五刀) · 유수(留水) · 유천(留天) · 신천(神天) · 오천(五天) · 신귀(神鬼) 등 9干이 백성들과 더불어 놀이를 나갔다가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곳을 살펴보니 어린 동자(童子)가 있었는데, 나이는 열다섯, 용모가 빼어나 모두가 예(禮)로 맞아 왕을 삼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고 나라이름을 가락(駕洛)이라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가락선원세계(駕洛璿源世系)’에 보면 태조왕 수로왕(首露王) 이후 11세 세종 김무력(金武力)의 대부터 크게 번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까닭은 김해김씨의 중조(中祖)라 할 수 있는 흥무왕 김유신(金庾信)이 그의 손자일 뿐 아니라 조부 김무력(金武力)은 신라조에 각간(角干)의 벼슬을 한 뛰어난 무장(武將)이었으며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신라의 종성(宗姓)과 인척을 맺고 가락국(駕洛國)을 합병, 소판 대양주도독안무대양주도군사장군(蘇判 大梁州都督按撫大梁州諸軍事將軍)의 지위에 오른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해김씨(金海金氏) 선원대동세보(璿源大同世譜)에도 상계(上系)편을 그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 본관지(本貫地) 연혁

▶ 김해 : 본래 가락국(駕洛國)으로 가야(伽倻)라 부르기도 한다.
구해왕이 신라에게 항복하자 법흥왕이 읍(邑)으로 만들어 금관국(金官國)이라 불렀다.
문무왕 때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은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 하였다.
고려조 성종이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라 고쳤으며 현종은 방어사(防禦使)로 강등시켰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다가 충선왕 2년 김해부(金海府)로 만들었는데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조선조 태종 때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조 때는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1895년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주요성씨 : 金, 董, 裵, 宋, 張, 海, 許씨 등


⊙ 파명록(派名錄)

▶ 金寧君派(京派) : 參判公派 · 橫城公派 · 安敬公派 · 石城公派 · 戶參公派 · 參贊公派 · 奉常公派 · 密直使公派 · 文簡公派 · 密直公派 · 平章事公派
▶ 監務公派(四君派) : 生員公鍊派 · 都摠管公派 · 生員公錄派 · 贊成公派 · 尙書公派 · 恭簡公派
▶ 版圖判書公派(三賢派) : 郡守公派 · 執義公派 · 翰林公派 · 進士公派 · 錄事公派 · 進義公派 · 判書公派 · 副護軍公派 · 判書公維公派
▶ 副議軍公巨公派 · 承仕郞公派 · 副正公派(襄毅公派) · 都摠管公派 · 判書公添釰派 · 判典公派 · 判書公不比派 · 左政丞公派 · 崇政公派 · 副護軍天翼派 · 判決事公派 · 進士公虔派 · 忠靖公派 · 都事公派 · 崇政公現派 · 休隱公派 · 長沙君派 · 參奉公麟瑞派 · 大提學公派 · 僉正公派


⊙ 씨족사(氏族史)의 개요

김해김씨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우리나라에서 수가 가장 많은 성씨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창건한 것은 서기 42년(후한建武 18년)이다.
수로왕(首露王)은 즉위한 지 6년 뒤 아유타국(阿踰陀國 : 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비(妃)로 맞아 10王子, 2公主를 두었다. 10왕자 중 장자(長子)인 거등왕자(居登王子)가 왕위를 잇고, 둘째 · 셋째 왕자는 모성(母姓)을 따라 허(許)씨로 계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옥보선인(玉寶仙人)을 따라 가야산(伽倻山)에서 운상원(雲上院)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부처가 되었으니, 지금도 경남 하남군(慶南 河南郡)에 칠불사(七佛寺)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거등왕(居登王)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들이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칭하고 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성한 만큼 후손들에 이르러 나뉘어진 분파(分派)도 148개에 이른다. 그 중 대표적인 분파는 다음과 같다.

김유신(金庾信)의 직계종파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京派(金寧君派)와 그의 아우 익경(益卿)을 중조로 하는 四君派(監務公派),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三賢派(版圖判書公派)다.

三賢派의 삼현(三賢)은 김극일(金克一), 김일손(金馹孫), 김대유(金大有)를 가리킨다.
수로왕을 1세로 하여 56세조 김유공(金維公)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이고 51세조 김지서(金之瑞)의 후손이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김평(金平)의 후손이 양의공파(襄毅公派)다.
40세조 김명해(金明海)의 후손에서 김명택(金明澤)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 김불비(金不比)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김만희(金萬希)의 후손이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김종정(金宗貞)의 후손이 숭정공파(崇政公派), 김천익(金天翼)의 후손이 부호군공파(副護軍公派), 김을동(金乙棟)의 후손이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김문(金汶)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이장(金以章)의 후손이 충정공파(忠靖公派)이다.
31세조인 김상인(金商寅)의 후손은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40세에 들어 김상경(金尙慶), 김중경(金重慶)의 두 후손이 있게 되었으나, 김중경(金重慶)의 후손은 없고 김상경(金尙慶)의 후손도 단계(單系)로 이어져 51세조 김운(金芸)의 후손이 유수공파(留守公派)로 분파되었다.
27세조 김진의(金進意)의 후손은 42세로 김시원(金時元)의 두 아들 이후 여러 파로 나뉘어졌다. 57세조 김대진(金大震)의 후손이 운은공파(雲隱公派)이고, 54세조 김세장(金世章)의 여덟 아들의 후손이 8개 파로 나뉘어졌는데, 김탁(金琢)의 후손이 문경공파(文敬公派), 김근(金瑾)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 김관의 후손이 한림공파(翰林公派), 김구(金球)의 후손이 충정공파(忠靖公派), 김연(金璉)의 후손이 도사공파(都事公派), 김현(金現)의 후손이 숭정공파(崇政公派), 김호(金琥)의 후손이 휴은공파(休隱公派), 김선(金璇)의 후손이 장사군파(長沙君派)이다.
56세조 김인서(金麟瑞)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51세조 김득하(金得河)의 후손이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50세조 김경신(金敬臣)의 후손이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이다.
22세조 김천여(金天與)의 후손은 단계(單系)로 이어져오다 38세 이후 두 계통으로 후손이 이어지고 있으나, 분파(分派)로는 김덕휴(金德休)의 후손 첨정공파(僉正公派)만이 ‘무오보(戊午譜)’에 보이고 있다.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 14년 백제 東北의 땅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셨을 때 군주가 되었는데, 관산성(管山城)싸움에서 신주병(新州兵)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성왕이 이끄는 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는데 기여하였다.
김서현(金舒玄)은 진흥왕(眞興王)의 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결혼하였다. 角干에 올라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다. 진평왕(眞平王) 51년(629)에 소판(蘇判)으로 角干 김용춘(金龍春)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고 있었을 때 아들 김유신이 적장을 베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金海金氏의 중시조 金庾信은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로 신라왕실인 만명부인(萬明夫人)에게서 태어났다. 진평왕 31년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심신을 수련했다. 629년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낭비성(娘臂城)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압양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 소판(蘇判)이 되어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백제군(百濟軍)과 여러 번 싸워 이겼으며, 진덕여왕(眞德女王) 1년 반역을 꾀한 비담(毗曇) · 염종(廉宗)의 반군(叛軍)을 토벌하였다. 648년 백제의 대양주(大梁州)를 공격하여 12城을 함락, 이찬(伊湌)이 되어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다음 해 침입한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고, 654년 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알천(閼川)과 상의,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武烈王 7)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 사비성(泗泌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문무왕(文武王) 3년 백제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667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 다음해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고구려 정벌 후 신라의 최고 위계인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올랐다. 문무왕 13년(673)에 죽었는데, 그 후 160여 년이 지나 흥덕왕(興德王) 10년(835)에 ‘순충장렬 흥덕대왕(純忠壯烈 興德大王)’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김흠순(金欽純)은 김유신의 동생이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고, 무열왕(武烈王) 7년 형 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과 호응하여 백제 유민들의 반란을 토벌했다. 668년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참전했고, 다음해 양도(良圖)와 함께 사죄사(謝罪使)로 당나라에 갔다가 다음 해 귀국했다.
김유신은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5남4녀를 낳았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원술(元述)이다.
원술은 전장에서 전세가 불리하자 부하의 권유로 후퇴한 일로 아버지인 김유신과 어머니 만명부인이 만나주지 않자 이에 탄식하며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문무왕 15년(675) 당병이 買蘇川城(楊州)에 쳐들어오니 원술은 지난날의 욕됨을 씻기 위해 다시 출전,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자식임을 한으로 여겨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화개(花開)에 식읍(食邑)을 받았다 하는데, 그의 후손이 진주김씨(晋州金氏)로 분적하였다.
김유신을 정점으로 하여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김해김씨는 그 이후 그만한 가세(家勢)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고려에서는 정승급 15명, 名臣 · 功臣 10여 명과 장군 8명, 提學 11명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