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솜씨/수 필

실천하지 않는 체험의 대가

철산. 케네디 2019. 5. 3. 08:43

실천하지 않는 체험의 대가



1. 묻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손안의 핸드폰으로 20초만 통화를 했어도 이 추위에 4시간 이상을 허비 안 해도 되는데. 좇아내지 못한 감기는 더 심해졌고, 30여 년 백수가 돈은 돈대로. 여름. 가을 그 좋은 계절 다 보내고 이 칼 추위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다녔다.

스마트폰 활용지도 봉사를 하면서, 불치하문(不恥下問)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며칠 전 용인시 죽전전철역 인근 단국대학교에 갔다가, 물어보지 않고, 어련히 죽전 전철역으로 가겠지 하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 버스는 긴 터널을 지나 산속, 다른 방향으로 가기에 그때야, 다시 물어물어 죽전 전철역으로 돌아오는 실수를 하고서도. 또 물어보지 않고 이 고생을 하고 다녔다.

 

연말이 되어 갑자기 운전면허증 갱신 기간 6개월의 끝자락이란 생각이 났다. 주섬주섬 들춰보니 1231이까지 정해져 있었다. 안내장을 보니 1종 보통면허는 건강보험공단의 정기검사 통보서가 있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신청이 가능하단다. 컴퓨터를 열고 인터넷으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양쪽 시력이 0.80.5 이상이라야, 인터넷 신청이 가능하단다. 정기검사 통보서를 확인해보니 교정 없는 시력이 0.5 이었다. 그러면 신체(시력) 검사를 보건소 또는 지정병원에 해야 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우선 필요한 사진을 현상하기 위하여 인터넷으로 보건소 인근 사진관을 검색해 현상을 했다. 그것도 괘나 까다로웠다. 사진 뒤에 배경이 없어야 되고, 반드시 두 귀가 보이게 정면으로 찍어야 한단다. 약삭빠르게 몇 푼 아끼려고 스마트폰으로 찍은 셀프 사진 3종 중에 하나가 겨우 적합하다며, 생각보다 많은 가격으로 현상을 했다. 성남 중원경찰서 바로 옆 보건소에 시력검사를 위해 찾아갔다. 그러나 서울특별시 보건소 이외는 신체검사를 할 수 없다며 인근 지정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영하 10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추위에 너무 번거로 왔다. 운전도 하지 않을 텐데,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이미 마음먹은 일인데.

집에 오는 도중에 있는 지정병원에서 시력검사는, 안경을 쓰고도 양쪽 다 0.6이었다. 1종 보통면허 기준인 한쪽이 0.8이상에 미치지 못하였다.

검사한 간호사가 1종 보통면허를 2종 보통면허로 하향갱신은 가능하단다. 추위를 조금 피해 볼가 하고 택시를 타고 경찰서 민원실에 갔다. 그러나 하향 면허갱신은 운전면허시험장에서만 가능하단다. 이 추운겨울에 4시간을 헤맨 것이 다 허사가 되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도로교통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면허시험장에 가야만 1종을 2종 면허로 갱신할 수 있단다. 면허를 갱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임이 고개를 들었다. 갱신 가능한 날짜도 토. 일요일 공휴일을 빼면, 31일 하루밖에 없었다.

 

4년 전에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경주까지 친구 네 명이 승용차로 문상(問喪)을 갔다. 귀갓길에 운전을 하는 친구가 대구를 지나 문경휴게소에서 운전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초기 공황장애로 약을 먹고 있는 친구였다.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놓은 지가 20여 년 가까운 내가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 운전이 쉬우니까 무난히 왔다. 그때를 생각해 면허를 갱신을 해야지.

연말인데 올해 들어서는 유독 추웠다. 기침감기로 약을 먹으면서, 섣달그믐날 면허 시험장을 갔다. 용인 신갈 면허장보다 서울 강남면허장이 편리한 것 같아 강남으로 갔다. 엄청난 사람들에 놀랐으나 노인들은 12번별도 창구가 있어 1시간 정도로 2종 면허증을 받아 쥐고는 신기한 특혜를 받은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30초만 사전에 물어보았어도, 추위에 그 고생을 안 해도 될 것을……. 기침감기는 음성이 변할 정도로 깊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다음날(201911)부터는 75세 이상 노인은 면허갱신이 까다롭게 되었다. 운동신경과 인지능력이 떨어져 사고가 많았단다. 갱신 기간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되었다. 사전에 2시간 안전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교육 중에 인지능력 즉 기억력, 주의력을 진단하고, 진단 결과가 좋지 않으면 추가 적성검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 결과에 따라 면허갱신을 제한할 수도 있게 된단다. 그러니 노인은 사전에 반드시 도로교통공단의 고객센터에 전화(1577-1120)는 필수다. 유일한 국가자격증인데. 전철에서 면허증을 다시 꺼내 보았다.

 

평소에 내가 입버릇처럼, ‘체면 불고 모르면 물어보라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을 실천하지 않는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2. 실천하지 못한 덕목으로

          천안을 지나며 흘린 눈물

   온양 역에서 전철이 출발하면서 시간을 측정해 볼 생각으로 시계를 보았다.

손목에 시계는 없었다. ‘집에 벗어 놓고 왔겠지하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옛 추억의 조각들로 퍼즐을 맞추며 즐겁게 귀가하는 온양온천나들이였다. 차창으로 봄기운에 파란 들녘을 보면서 전철의 속도만큼 즐거움을 더했다. 집에 도착하여 책상 위에 있어야할 시계는 없었다.

잃어버린 시계를 찾은 지 일주일 만에 시계를 또 잃어버렸다. 총무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가 목욕한 온천탕 이름과 전화를 물었다.

황급히 전화를 걸어 기억하고 있던 옷장 번호를 대고 혹시 시계가 있는지 확인을 부탁했다. 보관하고 있단다. 지난번 시계를 찾은 후, 그렇게 거듭한 다짐을 망각하고 또 잃어버렸다.

우편으로 붙여 줄 수 없느냐?”는 간청에 건강을 위하여 한 번 더 온천을 오시라는 말에 토를 달지 못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여 전에 시계의 행방을 몰라 평소 두는 책상 위를 샅샅이 뒤져봐도 없었다. 시계의 현재위치를 알 수 없으니 분실이 분명했다. 한동안 시계 없이 다녔다. 그러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시간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손목만 젖히면 볼 수 있는 손목시계가 편리하다 싶었다. 보관하는 시계 중에 먼저 보이는 놈에 전지를 갈아 끼워 차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화요일 동네 복지관에서 요가운동을 위하여 시계를 풀다가, 평소 시계를 벗는 곳은, 이 복지관과 집뿐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혹시 하고 복지관 사무실에 확인한 결과, 미화원이 발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진작 확인할 것을 한 달이나 지난 후에야 시계를 찾았다. 다음부터는 시계를 푸는 경우 반드시 호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떨 때는 주변을 확인하는 것을 습관화 해야지다짐을 했다. 시계는 물론 스마트폰 등 소지품의 분실 방지와 무심코 내가 버린 휴지 등 정리를 위해서도 준수해야할 덕목으로 다짐했다.

 

그럼에도 온양온천 나들이에서 또 실수하다니. 치매는 분명 아닌데? 시초인가? 늙음의 순리이겠지…….

어쩔 수 없이 이틀 뒤 왕복 4시간이 소요되는 온양온천을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한 두 사람에게 동행을 권했지만 백수들이 바쁘단다.

지난번에는 친목모임에서는 회비만 내고 총무와 회장의 뒤만 따라 다니며 친구와 즐겁게 수다를 떨면 되었다.

혼자 오게 되니 전철시간표, 온천장의 위치와 찾아가는 길, 입장료, 점심식사를 어디서 무었을……, 귀가하는 전철시간표 등등 모두가 스스로 챙겨야했다. 다시 찾은 온천장에서 대여섯 개의 시계 중에서 로고를 보고 시계를 찾았다. 노인들이 오는 온천탕이라 하루에도 두세 개의 시계를 놓고 간단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위해 재래시장 안의 지난번에 먹은 음식점을 찾아갔다.

그 식당을 찾지 못하고, 시장 안에 노인들이 북적거리는 국수집에 들어갔다. 벽에 걸린 메뉴 표를 보았다. 잔치국수 2,500. 칼국수3,500원 등 수도권보다 60%내지 80%가 사고 맛도 괜찮았다.

오후 2시경 귀가하는 전철을 탔다. 지난번에는 친구들과 떠들며 천안 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혼자인 이번에는 막냇동생의 가슴 아린사연이 아지랑이 속에 날카로운 아픔을 매달고 스쳐갔다.

 

내 고향은 하늘만 빠금히 보이는 두메산골 50여 호가 사는 동네에서 막냇동생은 80년대까지 서울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것도, 90년대 국립대학 교수가 된 것도 처음이었다. 특히 나의 권유로 전자공학분야의 우리나라 1세대였고, 4세에 국립천안공대 전산정보연구소장이었다. 동네와 시골 모교는 물론 가문의 자랑거리였다. 부모님은 모진 고생에도 자식들의 성공을 보람으로 삼고 견뎠다.

그 동생이 1996년 연말 교수들과 망년회로 늦은 귀가 길에 새로 뚫린 온양 천안 간 고속화 도로에서 뺑소니 사고로, 20년 나이 차이의 자식 같은 동생을 먼저 보냈다. 천안은 뼛속까지 아린 추억을 남긴 막내와 유달리 막내를 사랑하며, 평생을 일만 하며 살다 가신 어머니 생각에, 나의 메마른 가슴을 아리게 했다.

 

스스로 다짐한 덕목을 지키지 못한 사연으로, 혼자 한 나들이가 가슴 깊이 숨어있는 회한의 추억을 불러내어, 메마른 내 눈언저리에 이슬까지 맺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