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한 행동에 예방주사를 맞았다
鐵山 김종길
나는 1959년 8원부터 2년 6개월간 요행히 미군 부대 카추샤로 서울과 부산에서 근무하였다. 나와 두 살 차이인 동생도 거의 동시에 군 생활을 같이하면서 부모님의 걱정은 배가 되었다.
나의 군 생활은 아침에 8시 출근하고 오후 5시면 퇴근하는, 당시로써는 직장생활보다 더 편한 생활을 하였다. 내가 근무했던 미군사원조처(AFAK : Army The Force Assistant Korea)는 보육원, 학교, 병원 등을 신축하는데 필요한 시멘트, 목재, 철근을 미국에서 원조받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그렇게 건설한 건물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충정로 국제대학(경기대학), 서울여상 체육관, 진명여고 강당 등이었고 그 건물에는 AFAK이란 동판이 붙어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가 예산의 약 80%를 미국의 원조물자를 팔아 충당하였다. 그러니 우리 국군의 근무환경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동생은 최전방 화천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형으로서 적지 않는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1960년도 9월 말 토요일과 일요일 기해 동생 면회를 하러 갈 생각으로 1박 2일 외박을 허락받았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 춘천에서 1박하고 새벽에 화천으로 갔다. 부대까지는 군 검문소에서 트럭을 타고 면회를 갔다. 때마침 그날이 사단 체육대회라 서울에서 온 군 장교 부인들을 보고 놀랐다. 당시는 첨예한 남북대치 상태였고, 5.16 군사혁명 직후라 군 장교의 위상은 대단하였다. 사모님들의 의상과 외모는 영화배우들같이 화려하였다
나는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동생 면화를 갔다 온 것만으로도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출근한 나는 사무실의 분위기는 냉랭하였다. 내가 이번 주 토요일부터 외박허가 났는데 1주일을 먼저 갔다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미군사원조처장(AFAK) 스미스 소령은 나에게 단호히 사역 1주일의 징계를 내렸다. 동생 면회를 간다는 조급함에 외박 기간을 확인도 않고 간 과오에 변명할 수도 없었다.
같이 근무하는 김 대위가 최전방에 있는 동생 면회를 하러 간 것이니 선처를 건의했으나 단호히 거절당했단다.
김 대위는 그 일로 인해 내가 제대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힘들지 않은 6일간의 사역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가기가 멋쩍고 싫어, 2개월간 평택 미군 부대 카추샤 운전 교관을 하다 부산 미군 부대로 전출을 하러 갔었다.
군대의 존재 목적은 국토방위요, 전쟁이다. 전쟁은 조그마한 실수나 과실에도 생명은 물론 부대 전체의 위험 상황이 될 수도 있기에. 군율은 절체절명의 준수법칙이다. 미군은 일과 후 사석에서는 행동이나 대화도 상하 간에 계급 의식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업무 중에는 철저한 원칙과 명령 복종 관계로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외박 날 자를 착각한 과실로 인한 징계는 너무나 당연하였다.
우리 주변의 사회지도층 특히 이 시대의 정의로움과 공정의 화신인 양 위장하면서 행동은 온갖 탈법 위법을 저지르는 지도자들, “내로 남불 족”을 보면서 서민들도 지키는 보편적 가치인 상식만이라도 지키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나는 60년 전에 실수와 과실로 엄격한 책임을 진다는 예방주사를 맞은 것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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