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산소
나는 외갓집 칠 공주 맏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니 외조부모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외가에 갔다하면 이모들끼리 나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지는 노리갯감이었다.
이모들이 나를 먼저 업고 마실을 나가 숨거나, 친척집에 데리고 다니다 등에서 피곤해서 잠이 들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손자의 잠든 얼굴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모들이 극성이 대단했다. 철이 들어 외가에 가면 잔치를 벌일 정도로 외할머니와 이모들의 사랑은 남달랐다.
외가는 우리 집에서 서남쪽에 솟은 400미터 산 정상에서 보면 북동쪽은 우리 집, 서남쪽의 기슭에는 외가집이 보였다. 외가로 가는 길은 서북쪽의 낮은 산등성이를 넘어, 다시 동남쪽으로 8부 능선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산길을 가야했다. 그 길을 다람쥐처럼 수도 없이 다녔다. 지금은 나무숲이 우거져 길은 흔적도 없이 막혀버렸다. 밀양 시내를 돌아가면 약 15킬로는 족히 된다. 그 길은 어머니가 가마 타고 시집오던 길이고, 걸어서 반나절길이고, 승용차로도 20분 정도 소용된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 집은 살기가 힘든 형편이었고, 외가는 넓은 들판에 논도 많고, 가을이면 내가 수없이 많은 밤을 주울 수 있는 큰 뒷산도 있는 부자였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도, 우리 집 옆 산모퉁이 ‘배람당’ 논배미도 외가에서 마련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일본의 보국대 징용을 피해 외가에 숨어 있을 때는 수시로 필요한 양곡을 비롯해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가 동네는 ‘청주 한씨’ 집성촌으로 30여 호가 모여 살고 있었다.
어릴 때 명절과 방학에 외가를 가면 외할머니 아니면 이모들 손을 잡고 이집 저집을 내 집처럼 다니며 꼬마 손님대접을 톡톡히 받기도 했다. 그 것은 외할아버지의 재력과 위엄, 이모들 활동력 덕분이었다. 그런 외가를 객지 생활을 시작하면서 발걸음이 뜸해졌고,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한 것이 60여년이 되었다. 더구나 이모님들은 뿔뿔이 흩어져 시집가서 살고 있으며, 외가의 대소사에도 공무에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 가본 적이 없었다. 밑으로 세 분 이모님 말고는 얼굴조차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나를 그렇게 사랑하던 외할머니의 산소의 위치도 제사날도 기억하지 못하는 범절(凡節)도 없는 외손자와 이질(姨姪)이 되고 말았다. 황혼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외할머니, 이모들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난해 고향을 들렸다. 조카의 안내로 연극배우 손숙 씨가 재단이사장으로 있었던 괘나 유명한 ’밀양연극촌’을 처음으로 구경을 갔다. 그 옆 옛 외가동네가 있는 ‘무연리’를 들렸으나 외가의 위치만 기억날 뿐 흔적도 없었고 외할머니의 산소도 찾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가끔 고향을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는 둘러보면서 왜 외할머니의 산소는 찾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대한 변명과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다음에는 나를 대신해 고향의 선산을 지키며 일가친척은 물론 외가까지 두루 살피며 고생한 동생내외를 앞세워서라도 기어고 외할머니의 산소를 찾으리라 생각하였다.
온갖 정성으로 나를 사랑한 외할머니, 그렇게 예뻐라 한 이모들을 위한 고마움을 진작 마음 한구석에라도 두지 못하고 황혼 길에 뒤 늦게 후회해 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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