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온 시/모셔온 시조(시조 창작이론)

[스크랩] 시조 창작법

철산. 케네디 2016. 5. 21. 19:18

시조 창작법

이정환(교원대대학원 시절 보고서임. 본인이 기억할지 모르겠음)

 

1. 서언


  말은 인간 존재의 영원한 비밀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은 태어날 때부터 일종의 메타포오적 성격을 지닌다. 니체가 언어를 두고 '움틀거리는 메타포어의 무리'라고 일찍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가 메타포오적 속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같은 말이 같은 용도로 빈번히 사용되면 메타포어적 속성이 엷어질 뿐 아니라 참신성 마저 잃게 된다. 그래서 염증을 느끼게 된다.
시는 언어를 통해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해야 한다. 그 언어를 통해 우리가 많은 생각에 젖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언어가 환정적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글에서는 어떤 학문적인 체계 아래 '시조 창작법'을 논하기 보다는 다소 파격적이더라도 현재 창작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관점 아래 차례에 큰 구애됨없이 이야기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2. 시(시조)에 대한 두 견해

 

  1) 알딩턴의 이미지(이미지스트) 선언

    ① 일상어를 사용하되 정확한 말을 고르며 모호한 말이나 장식적인 말을 배척한다.
    ② 새로운 기분의 표현으로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③ 제재의 선택은 자유로워야 한다.
    ④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⑤ 모호하고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견고하고 명확한 시를 쓴다.
    ⑥ 긴축(집중)된 것만이 시의 본질이다.

 

 

  2) 가람 이병기의 시조 혁신론

    ① 실감 실정을 표현하자.(새로운 감정을 실감나게)
    ② 취재의 범위를 넓히자.(현실에 맞게 현대의 용어로)
    ③ 격조의 변화(읽는 시조에 걸맞는 격조로)
    ④ 연작을 쓰자
    ⑤ 쓰는 법, 읽는 법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람의 주장과 알딩턴의 생각엔 유사점이 있다. 새로운 감정을 실감있게, 현실에 맞게 현대의 용어로, 읽는 시조에 걸맞는 격조로 창작의 방향을 잡았던 가람의 생각은 정확한 일상어로, 새로운 기분의 리듬으로, 자유로운 제재의 선택으로 시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했던 이미지스트들의 생각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람의 제자 이호우는 그의 마지막 시조집 '휴화산' 후기에서 '누군가가 말하기를 시조는 가락과 의미는 있어도 이미지를 결했다고 했다. 유의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진다. 앞으로 재질있는 좋은 시조인이 성취시켜 줄 것을 바라고 또한 믿고 싶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깨어 있는 시조시인들이 이미지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현대 시조의 창작 방향

 

  시조는 일정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한 시인의 개성 실현이 어렵다. 한 시인의 존재 가치는 그가 쓴 시에서 다른 목소리의 비중 여부에 달려 있다. 개성의 극대화는 시라는 미적 장치를 통해 꿈꾸는 시인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이므로 개성의 극대화를 위해 실험정신은 언제나 전위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시조가 아무리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보편적 질서의 반영이며, 시조적 틀을 통하여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시조의 형식은 시인이 시작을 끝냈을 때 비로소 그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할 수 있다.'(박철희)라는 한국 시가의 자기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변화를 수용하는 전체적인 원리를 밝힌 박철희 교수의 논리를 또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3장의 형식과 12음보(절)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정형시라는 테두리 안에서 현대시조의 창작 방향이 잡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3장 구조와 의미의 율격은 시조의 마지막 노선이자 숙명이 되어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의 그 다채로운 분방함을 버리고 정제와 단아함을 통해서 인간의 정서를 그것도 정서의 궁극을 찾아나서야 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의 업보와 같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의 혼란을 고전주의적 정신세계를 추구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의 그것처럼 옳은 일이다.'(김대행)
  위의 논리는 가장 반현대적인 시조의 형식에 대해 오히려 그러한 속박을 즐겁게 선택하는 시조시인들의 견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즉 시조를 쓰는 행위 또한 다양한 문화 가치에 대한 개인의 선택의 한 방법임을 설명하면서 3장 구조와 의미의 율격을 현대시조가 시조로서 존재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시조 창작의 궁극적인 방향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행과 시련은 시의 음악성에 따라 결정되어야 작시의 진정한 창조성이 확보된다. 시상의 편의에 따라 시행과 시련을 정리한다면 작시의 창조성이 이완된다. 현대시는 지금 이러한 이완의 상태에서 시상만을 단련하려는 편향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조를 보면 이러한 편향에서 벗어나 미적 의식을 시의 음악성과 융합시키려는 노력을 만나게 된다.'(윤재근). 윤재근은 우리 현대시 작시의 결합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시의 음악성 경시 풍조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현대의 여러 상황을 바라보고 그 느낌을 시상화하여 미적 구조를 이루고자 하는 점에서 현대시조는 현대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시조가 지닌 구조가 자유시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시의 음악성과 미적 의식에 부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발견된다. 윤재근의 논리로 볼 때 자유시의 방만함을 특히 경계하며, 시조를 창작하는 시인이 얼마나 시의 음악성에 정력을 쏟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시조는 창사(唱詞)가 시로 옮겨 온 것이다. 시절가조이다. 시절가조란 현실 반응에 민감한 시조, 현장감있는 시조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는 점에서 오늘의 문제에 초점이 닿아 있어야 한다.'(이우걸) 이우걸은 시절가조로서 현실 의식, 시대정신을 시조에 담아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한다.

  현대시조는 보다 개성적이고 보다 육화된 서정을 요구하고 있다. 결정론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보다 열려 있는 의식의 창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는 언어의 꽃이기를 희구하게 되었다. 이제 시조는 보편적 서정성의 획득을 위한 형식이라는 그릇과 그 보편성으로 획득할 수 없는 철저한 개성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어야 현대시조로서의 또 다른 향기를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시조는 시적인 면과 가적인 면이 조화를 이룰 때 그윽한 서정시의 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4. 작품의 실제

 

  1) 창작  시 일반적으로 고려해야 할 유의점(내용·형식 양면에서)
    ① 장 배열, 행 구분 시 다양한 형태 추구(당위성, 타당성 확보)
    ② 불현듯이 잡히는 낱말이나 사물에서 얻는 깨달음이나 감흥 등 이미지 포착 훈련을 쌓아야 한다.
    ③ 착상 후 붓을 들기 전까지, 속에서 무르익을 때까지 계속 궁글려야 한다. 일찍 글로 옮기면 고수가 아닌 이상 실패하기가 쉽다.
    ④ 신선한 언어를 찾는다. 시조에 쓰이지 못하는, 쓸 수 없는 언어는 없다. 새로운 언어를 얻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마치 자신의 식솔을 거느리듯.
    ⑤ 낱말 놓이는 위치, 구(句)가 놓이는 위치가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효과적이도록 배열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오랜 수련 끝에서야 가능)
    ⑥ 담지 못할 주제는 없다.
    ⑦ 전혀 다른 의미의 언어와 언어의 부딪힘(꽃과 돌, 무지개와 강철 등)을 통해 즉 유기적인 언어 조직으로 탄력을 유지하고 하나의 소우주, 하나의 생명체, 유기체로 탄생시켜야 한다.
    ⑧ 제목은 생명이다. 주제를 잘 함축한 제목을 붙여야 한다.(시작 전후)
    ⑨ 3장(三章) 중 어느 한 장이 그 긴장이 다소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다른 두 장의 긴장감에 저해되지 않도록, 물론 단순한 서술, 설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⑩ 가락을 잘 다스려야 한다. 가락을 잘 타야 한다. 자기만의 가락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⑪ 시각적인 면, 회화성 짙은 작품을 빚어 본다.
    ⑫ 음악성이 뛰어난 시조를 빚어 본다.(의성어 활용 등)
    ⑬ 회성과 음악성이 더불어 구현되는 작품을 구상해 본다.
    ⑭ 남이 노래하지 않은, 미처 노래하지 못한 세계를 조명해 본다.
    ⑮ 단수 훈련에 힘을 기울여 의미의 함축에 힘을 쏟는다.
    16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한다.(이호우의 작시 태도)
    17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낱말, 조사, 장章, 한 首)
    18  평면적, 직선적 표현, 뻔한 생각을 버리고 입체적인, 탄력적인 볼륨이 있는 시조, 볼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쓴다. 다소 애매모호 하더라도 -물론 지나치게 난해해서는 곤란하다- 양면서, 다의로 해석, 분석이 가능한 詩가 되어야 한다.
    19 작은 세계를 깊이 파고 들어야 한다. 끈질긴 천착이 요구된다.
    20 언어 조탁, 탁마, 언어 부리기- 감성 훈련, 언어 감각 훈련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21 쓴 다음 소리내어 읊기를 통해 군더더기를 걸러 내고 자연스러움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22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의 시조를 써 보기도 한다.
    23 지시어인 '이, 그, 저'와 같은 말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뜻을 강조하거나 밋밋한 가락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2) 주제에 따른 작품의 여러 갈래

 

    (1) 자연 친화, 자연과의 교감을 다룬 시조 - 인생과 결부된 시조.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 '개화', 조운의 사설시조 '구룡폭포', 석성우의 '산란', 정완영의 '해바라기 三章', '간만의 차', 김상옥의 '축제', '樹海', 임홍재의 '염전에서', 박재삼의 '내 사랑은', '가을에' 유재영의 '월포리 산조' 박기섭의 '川內洞 가을', '한추여정', 서벌의 '노자를 읽다가'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 풀 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 절애에 한 번 굴러 보느냐
                               -조운 <구룡폭포> 전문

 

  세속적 관념이 일체 배제된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자기 승화의 세계로 자연시이면서 인생시라고 단정할 수 있겠다.

 

 

  어느 날 어느 별에
  가누어 온 목숨이냐

 

  실바람 기척에도
  굽이치는 마음있어

 

  네 향기 그 아니더면
  산도 어이 깊으리

 

  산기슭 무거움에
  실뿌리를 내리고서

 

  생각은 골 깊어도
  펼쳐 든 하늘 자락

 

  검(劍)보다 푸른 줄기에
  날빛 비껴 서거라

 

  정토(淨土) 저 아픔이
  얼마만큼 멀다 하랴

 

  山窓에 빛을 모아
  고쳐 앉은 얼음 속을

 

  장삼(長衫)도 먹물에 스며
  남은 날이 춥고나
              -석성우 <산란> 전문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가락이 아주 자연스럽다. <산란>과의 교감을 통해 인생의 깊이가 더해지는 느낌이다. 간절함이 마음에 아로새겨 진다. 참으로 되씹어 읽을수록 순화되는, 메마른 정서에 한 동이 물이 퍼부어지는 듯하다. 마음을 오랫동안 닦지 않고는 해후할 수 없는 작품 세계이다.

 

  서울서 바라볼 때는 이 제주가 섬이더니
  정작 제주에 서니 서울이 또한 절도(絶島)로고
  생각도 차고 이우는 이 간만(干滿)의 사이사이
                      -정완영 <간만(干滿)의 차(差)> 전문

 

  시조단에서 정완영은 독보적인 존재이다. 팔순에 가까운 오늘 날에도 여전히 작품을 쓰고 있고, 그 특유의 가락은 감히 따를 자가 없다. 그래서 그 추종자, 아류도 적지 않게 배출(?)했다. 위의 시조에서는 제주와 서울의 지리적 대비를 통해 별안간 서울을 절도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시인의 느낌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에서 정말 서울이 '절도(絶島)'가 되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것은 종장이 아주 적절하게 초중장의 의미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도 차고 이우는 이 간만의 사이사이' 그 얼마나 뒤어난 결구인가. 이렇듯 정완영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삶의 진실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잘 익은 가락으로 담아낸다.

 

  도끼에 닿기만하면 선 채로 썩어지는 나무
  한 번 보기만 해도 삽시에 연기로 갈 앉는 나무
  몇 백리(百里) 지름을 가진 그런 숲 속에 묻히고 싶다

 

  숨을 거두는 향기 속에 멍석만한 꽃이 피고
  먹으면 마취되는 아름드리 복숭아 열매
  인종은 벌레만 못해, 발도 아예 못 붙인 이곳

 

  칠흑의 머리를 푼 수양버들이 달려 오고
  휘황한 등불이 매달린 계수나무도 달려와서
  구천(九天)에 휘장을 두르고 세상 밖에 노닐고 있다
                                 -김상옥 <수해(樹海)> 전문

 

  쉽게 그 내용이, 주제가 와 닿지 않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나 그 규모가 큰 중후한 측면이 있다. 김상옥 특유의 유장한 느껴지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선 채로 썩어지는 나무, 삽시에 갈 앉는 나무'라는 표현에서 긴박감이 느껴지는 시인의 상상력이 힘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본다. 첫수가 드러내고 있는 어떤 상황 설정이 마지막 수에서 웬만큼은 연결지워져 그 의미가 떠올려지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시조에 깊은 사상성을 담아낸 점에서 정완영과는 그 차별성이 확연한 시인이다.

 

  미친 파도를
  가록막을 제방도 없이
  버려진 뻘밭에서
  남모르게 열병을 앓다
  각(角)이 진 인고의 자세로
  부활하는 몸이여

 

  어느 뉘 아린 뜻이
  물보라로 넘치는가
  간조(干潮)의 내안(內岸)은
  안개에 싸였는데
  끈끈한 적의를 안고
  재우치는 태풍을

 

  젊음이 난파당한
  떼죽음의 모래톱에
  이마를 맑게 씻고
  물빛 연한 시간을 열면
  비탈진 목숨의 혼(魂)이
  물살에 어린다

 

  어기찬 노역(勞役)의 끝
  밧줄을 휘감아도
  세월은 어찌하여
  술이 괴듯 괴는가
  깨어진 등피(燈皮)를 닦고
  짠 기운으로 버티자
                  -임홍재 <염전에서> 전문

 

  삶을 직시하는 치열한 정신이 전편을 관주하고 있다. 감동의 진폭이 크다. 적절한 시어들이 주제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소금의 생성과정을 인생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는데 그 절절함이 끝까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만안 주제를 결코 짧지 않은 네 수(首)에 담아 빚어내기란 쉽지 않다. "각(角), 인고, 부활, 간조, 내안, 적의, 난파, 혼, 노역, 밧줄, 등피……' 이런 낱말이 이 시에선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갈래
                   -박재삼 < 내 사랑은> 세 수 중 둘째 수

 

  세상이 사는 법은 가을 나무 같은 것
  그 밑에 우리들은 과일이나 주워서
  허전히 아아 넉넉히 어루만질 뿐이다
                   -박재삼 <가을에> 세 수 중 마지막 수

 

  사랑의 시편 중에서 박재삼의 <내 사랑은>은 가히 절창이라 이를 만하다. 초중장의 열정적인 표현이 종장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갈래'에 와서 절묘의 절정에 도달한다. 어떤 이는 생략된 첫 수, 셋째 수 없이 이 한 수 만으로도 그 어떤 사랑의 시편과도 대적해 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진정한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참으로 온몸으로 보여 주는 절창이다.

  아울러 <가을에>에서 보여 주는 원숙미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믿는다. 신산의 삶, 온갖 인고의 벼랑을 잘 버티고 이겨낸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인생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쩌응 터질 듯 팽창한
  대낮 고비의 정적(靜寂)

 

  읽던 책을 덮고
  무거운 눈을 드니

 

  석류꽃 뚝 떨어지며
  어데선가 낮닭소리
                 -이호우 <오(午)> 전문

 

  이호우의 그 기개가 그의 시조 전편에서 느껴진다. 쉬이 좇지 못할 드높은 정신이 <깃발>과 같은 시조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단수를 많이 다루었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다. 완벽을 끈질기게 추구했기 때문이다.
  위의 작품도 단수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다. 초장 첫 낱말 '쩌응'이 이미 이 시의 성공의 열쇠를 집어 올리고 있다. 터질듯한 대낮 고비의 정적과 책 읽던 무거운 눈, 석류꽃 뚝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낮닭소리 들려오는 시적 장치들이 짧은 시형 속에서 그 효과를 십분 살리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된다. 적절한 의성어의 활용,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인 이미지의 결합과 시인이 그 상황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점이 이 시를 완벽에 가깝도록 하고 있다. 다만 제목 <오(午)>가 걸린다. 한자어 제목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본다.

 

  녹슨 배경 하나 비스듬히 버려졌고
  그 날 밤 빈 배 두엇 저음으로 가라 앉는
  바다는 4악장 쯤서 가로 접혀 있었어

 

  하얀 뼈로 떠오르는 달이며 늙은 구름
  누군가가 가만히 해안선을 끌고 와서
  먼 기억 풍금소리를 꺼내 듣고 있었어
                   -유재영 <월포리 산조> 전문

 

  어법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황량한 분위기임에도 이상하게 아름답다. 배치한 이미지의 치밀성으로 하여 시조라는 틀이 어떤 언어를 가두는 형(型)이 될 수 없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가 이 시를 읽는 동안 어떤 형식에 이 시가 담겨 있는가를 지각할 수 없을 만큼 시 형식을 깊이 감추어 놓았다. 시인의 의도에 의해 어떤 분위기를 전달 받게 되는 그림이다.

  '녹슨 배경, 저음으로 가라 앉는, 빈배, 하얀 뼈, 늙은 구름' 등을 통해 고장난 문명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감정의 절제와 시어의 확장, 실험의식, 시대의 증언 등이 잘 함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연못에 하늘 한 쪽이 가만히 드러 눕는
  오로지 가라 앉는 아무 것도 잡히잖는
  막막한 이 낮 한 때를 가랑비는 오고 있다

 

  두자 해도 둘 데 없고 마자 해도 말 것 없는
  홀로고 홀로만인 참으로 비어 있는
  다 끝난 이 낮 한 때를 가랑비가 오고 있다
                       -서벌 <노자(老子)를 읽다가> 전문

 

  이 작품은 제목 <노자를 읽다가>가 그 무게를 더해 주고 있다. '가랑비와 노자'의 비상관 관계의 깊은 상관성이 의미를 심화시켜 주고 있다. 어떤 결단이나 정결한 체념 끝에 평화를 되찾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분복을 읊조리고 있음을 엿본다. 첫 수 종장의 끝 구(句) '가랑비는 오고 있다'와 둘째 수 종장 끝 구(句) '가랑비가 오고 있다'의 조사의 변화(는→가)도 지엽적인 것이긴 하지만 하나 눈여겨 볼 만하다.

 

 

  川內洞 가을빛이 옛날에 눈맞춘 너의
  눈빛 같다 희망 같다 삭아내린 맹서 같다
  단추를 달면서 잠시 망설였던 어느 아침
  선 채로 문득 듣는 물소리도 그렇지만
  연륜의 길섶에서 따내 버린 실밥 같다
  꿰매는 단춧구멍에 얼비치는 눈물 같다
                       - 박기섭 <川內洞 가을> 전문

 

  이 시조는 두 수를 구분 없이 이어 배열한 것이 특징인데, 새겨 읽게 되면 그 구조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아마 그것은 첫 수 초장의 후구 '옛날에 눈맞춘 너의'로부터 비롯되지 않나 싶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럴 수 없이 자연스러운 의미와 가락으로 사랑의 애절함이 노래되어지고 있어 가슴이 미어짐을 어찌할 수가 없다. 단추를 달면서 잠시 망설이는 아침이며, '선 채로 문득 듣는 물소리도 그렇지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추 다는 일과 물소리의 충돌이 절절함 속에서 언어 미학을 성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같다'를 무려 다섯 번이나 빈번히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을 내용을 다 담고 있으며, 오히려 그 되풀이가 음악성을 부여하고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이상으로 자연과의 교감의 세계를 다루면서 인생의 의미를 일깨우는 시편들을 살펴 보았다.

 

  (2) 역사 의식이 표출된 시조

 

 

  사랑은 다하지 못해 돌 속에 임을 본다
  그믐에도 달이 뜨면 사모 먼 칠보교여
  못다한 애한을 안고 몸을 던지 아사녀

 

  대석 층층 길을 열면 뜰 가득 적막인데
  여섯 모 빈 관 쓴 채 구품의 탑 한은 높고
  쪼개진 달빛을 모아 출렁이는 저 영지
                             -김정휴 <무영탑> 전문

 

  진주를 하나로 잇는 진양교가 누워 있다
  오늘도 봄바람 타고 이 난간을 짚고 서면
  왜인의 시린 칼날이 콧등에 와 닿는다

 

  남강은 산 역사의 강 꽃은 져도 푸르러 오고
  저 물결 멎는다 해도 그의 넋은 백사(白沙)로 남아
  임진년 덜 씻긴 한을 헹궈내고 있을 거다

 

  강안(江岸)에 길로 자란 푸른 대밭 푸른 노래
  논개 우닐던 자리 대나무로 앉은 뜻은
  우리네 앉을 자리를 바로 일러 줌 일게다
                            -원용문 <남강에서> 전문

 

  앞의 두 작품을 두고 이우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영탑>은 시로서는 대단히 세련된 작품이다. <무영탑>과 그에 얽힌 얘기를 이만큼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재능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역사의 피조물을 바라보는 작자의 눈이 지나치게 온건하다는 점을 지울 길이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시가 많은 말을 해야 하고 작자의 시선이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다면 이 작품은 성공한 작품이다.

  <남강에서>는 특수한 지리적 명칭과 그에 연관된 감정은 어느 시인에게나 마찬가가지라 하더라도 새로운 시적 묘미를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그러한 맹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인의 시린 칼날이 콧등에 와 닿는다'나 '강안에 길로 자란 푸른 대밭 푸른 노래' 등과 같은 신선한 표현을 얻고 있으면서도 <남강에서>를 바라 보는 그의 시선에서 우리는 새로움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식을 담은 시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본다. 시조의 현실적 기능에 관심을 가질 것과 참다운 역사의식을 지니고 참다운 시절가조를 창조해 나가야 함을 아울러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3) 치열한 내면 탐구, 내적 조응의 세계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 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이우걸 <팽이> 전문

 

 

  너는 위안이다, 말없는 약속이다
  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를 위해
  누군가 몰래 두고 간
  테라스의 불빛 하나
                       -이우걸 <섬> 전문

 

  그러나 직립(直立)한다, 강동(降冬)의 사내들은

  저 끝없는 황량에
  결빙을 못질해도

 

  견고한 뼈를 씻으며
  불퇴전의

 

  활을
  든다.
             -박기섭 <강동(降冬)의 시(詩)>

 

  소제목에 걸맞는 예로 적합한 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위의 세 단수들은 저마다의 강점을 지닌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팽이>에서 우리는 시인의 불굴의 시의식, 그 가열한 정신의 불타 오름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게 된다. 초장에서 볼 수 있듯이 '쳐라'라고 부르짖고 있다. 어떤 시련, 어떠한 살 찢기고 피흘리는 고통을 당할지라도 이겨내리라는, 꿋꿋이 견디어 내리라는 결연한 의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을 직시할 수 있다.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접시꽃을 피우기까지 굴종하지 않고 버티어 내는 일이 어찌 수월한 일이겠는가? 살아 꿈틀거리는, 견고한 시정신을, 우리는 <팽이>에서 가슴 뿌듯하게 읽는다.

  <섬>이 성취한 세계도 값지다. '짓밟혀서 돌아 오는 어두운 사내를 위해' 위안이 되고 약속의 땅이 되는 섬, 그 불빛 그 희망을 읊고 있는데, 시의 분위기가 독자의 시선을 강한 자력으로 이끄는 듯 하다.

  박기섭의 <강동(降冬)의 시>는 단수로서 그 형태가 매우 독특하다. 섬세한 행 구분, 결연한 의지, 지사적 결의가 돋보인다. 행 구분이 장애를 주지 않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이 시의 큰 장점은 침묵의 공간을 확보하게 된 데에 있지 않나 한다. 긴장된 공간이 마력을 가졌고 남성적이고 탄력있는 언어들이 힘있는 시조를 만들었다. 초장 첫 구의 불완전한 문장이 침묵의 공간 확보를 도왔고, 한국화의 여백처럼 독자에게 깊은 연상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5. 결언

 

  그 밖에도 현대시조가 다룰 수 있는 내용 영역은 많지만 여기서는 형편상 줄인다. 예를 들면 묵시론적 미래 전망의 세계, 환경 문제를 다룬 작품, 사물과 삶의 미시적 조응, 조명의 세계 등이다.
실제 시조창작을 통해 작품을 쓸 수 있는 안목을 키우고자 하는 본래의 목적에 제대로 부합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며, 그 핑계를 '시간 부족과 체계적인 공부 부족'에게로 부끄럽게도 감히 떠넘기며 글을 맺는다.

          *참고 문헌: <우수의 지평> 이우걸 시조 평론집 외 시조집 다수

출처 : ♣풍경소리♣
글쓴이 : 장비 원글보기
메모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