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솜씨/수 필

앉은뱅이책상

철산. 케네디 2015. 3. 24. 23:29


                                        앉은뱅이 책상
                                                    김 종길

    여기가 내 고향인가, 산천초목과 가까운 친척이외는 낮익은 사람도 없다. 그렇게 다정하던 친구들도 없고 모두가 낮설은 산골, 여기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이란 말인가 싶다.              

고향을 갈 때마다 어릴 때 대청마루와 옆방을 지나 한평반 남짓한 내가 쓰던 뒷방과 내만이 사용한 앉은뱅이책상, 그리고 초가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향을 지키는 동생이 초가집을 헐고 양옥집을 지으면서 부모님의 손때흔적과 내가 뒹굴던 정든 초가집이 함께 모두 없어졌다. 더구나 그 초가집을 찍은 사진 한 장도 없으니 내 마음은 고향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일 때도 있었다. 고향에 가면 현대식 동생 집에서 지내기는 편리하고 좋은데 마음 한구석에는 옛 초가집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볏짚으로 뚜꺼운 정만큼 겹겹이 쌓여있는 지붕은 듬직한 아버지 같이 비바람 폭풍우도 막아 주었다. 어머니의 유일한 공간이요 소설보다 더 많은 사연을 가진 어두컴컴한 정지와 찌그러진 양은그릇도 함께 사라졌다. 흑인처럼 새까맣게 그을린 채 부동자세로 서있는 기둥과 나의 허기진 갈비뼈만큼 앙상한 서까래도 흔적도 없어졌다.

더구나 거미줄 친 사진틀에 꽂혀있던 흑백사진 몇 장의 아련한 추억마저 행방이 묘연하다. 비좁은 방에서 올망졸망 형제간에 다리를 포개어 자면서 겨울 새벽이면 문틈으로 스며든 산바람의 추위를 막으려고 서로가 끌어당기던 솜이불도 안 보인다. 겨울이면 알밤 구워먹고, 언 손 녹여주던 화롯불, 새벽잠 없는 할머니가 긴 담뱃대를 땅땅 치며 잠을 깨우던 놋쇠화로는 어디로 갔을까.

아침마다 식구들 세숫물에, 여름이면 등목하고 사시사철 소먹이 물로 이용하던 집 뒤 우물도 없어졌다. 나의 과거가 깡그리 없어진 것 같아 서운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겨우 낯익은 것은 마당 앞에 쓸모없어진 곡식뒤주와 폐방이 된 방 한 칸과 마구 깐이 있는 아래채다. 거기에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만 잔득 안고 볼품없이 서 있을 뿐 내가 떠올릴 추억은 별로 없었다.

고향을 올 때마다 찾아 가는 선조들의 산소 방문길에 동네를 지나가야 하는 내 발걸음을 부여잡고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돌담 너머로 정이 담긴 음식을 주고받던 그 담은 허물어져 있었다. 내 친구가 살든 집은 문풍지가 갈기갈기 찢겨진 채 매달린 문짝, 잡초 우거진 빈집은 고향이에 대한 내 향수가 무너져 가는 것 같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보릿고개에 허기진 그 시절에도 잘 살아 보겠다고 활기차던 동네였다. 다정했던 동무들의 모습도 찾을 길이 없었다. 동네 서북쪽 산모퉁이를 휘돌면 하늘만 보이는 산골짜기는 천혜의 청정지역이었다. 어릴 때 뛰놀다 허기진 배 채우고 마른 목 축이려 스스럼없이 엎드려 물을 한 것 마시던 개울이었다. 지금은 산골 시내 물도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 맑은 물 계곡 따라 외지인들의 괴물 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생기를 잃어 가고, 그 산골의 아름답던 자연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낮선 동네가 계곡 따라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어머니와 고향이란 말자체가 듣기만해도 본능적으로 온 몸이 저리도록 정다웠다. 그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를 연상하며 꿈에도 고향을 사랑했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가슴속에 자리 잡은 내 향수가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다행이 양옥집 옆에 크고 작은 어머님의 손때가 묻은 항아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독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 정화수 떠놓고 새벽마다 두 손 모아 비는 어머니의 합장한 손같은 항아리들을 발견하고는 아! 비로소 나의 어머니를 만난 것 같아 고향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동생네 옆집은 친척이 살다 이사 가고 동생이 사들여 담을 헐고 같이 쓰는 외딴집이 있었다. 그 집의 작은 방은 조카가 대학입시 준비할 때 조용히 공부하던 방이다. 그방은 대나무 숲과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 제법 운치가 있는 방이었다. 그 방문을 열는 순간 잡동사니 물건 밑에 내가 가장 아꼈던 70년이나 된 앉은뱅이책상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나는 잃어버린 내 영혼을 찾은 것 같아 무척 반가웠다. 그 책상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보다 네 살 위인 삼촌이 조카인 내가 공부할 때 불편 할가봐 만들어 준 것이다. 서투른 솜씨에 송판을 자르고 대패질을 해서 만든 앉은뱅이 책상이었다. 그 책상에서 15년 이상을 밤이면 살을 맞대고 공부를 하던 내 분신 같은 책상이었다. 지금은 볼품없는 그 책상서랍에 가끔 어머니가 밤새워 공부하는 나를 위하여 동생들에게는 주지도 않던 삶은 고구마를 밤참으로 넣어두기도 했었다. 때로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용돈도 넣어주시던 그 책상이 아직도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그대로 살아 있었다. 당시에는 시골에서 자기책상을 가지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밥상을 사용하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을 묻히며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몇 년 전에 그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 앉은뱅이책상이었다. 그 책상은 친구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나의 가장 친밀한 친구요 나만이 사용하는 유일한 가구요 나의 재산이었다. 그것이 행방을 모르다 이번 고향방문길에 분신 같았던 그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버릴 물건이지만, 나에게는 천금 같은 귀중한 보물을 찾은 것이다.

이번 고향 길에 어머니의 손때 묻은 장독대와 삼촌의 혼이 담긴 앉은뱅이책상을 찾았으니 그 곳은 역시 내 고향임이 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