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 때 경제전쟁은 시작되었다 (1)
-전쟁전야 일대혁신 전략의 시작 -
1990년 5월말에 30년 공직생활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한화석유화학에서 제2의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50대의 나이로 공무원사회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기업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도전이었다. 더구나 당시 기업환경은 90년대 전후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군사적인 냉전체제는 완화되었으나, 세계가 하나의 무역시장으로 개편되면서 국가와 다국적 기업 간의 치열한 경제전쟁이 예상되는 태풍전야 같은 위기상황에 접어들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는 국제 무역이 다양화됨에 따라 종래의 선진국 위주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으로는 국제간 거래질서를 확립하는데 한계에 부딪쳤다. 농업, 서비스, 해외 투자, 지적재산권 등이 국제간 유통이 증가하고, 거래형태도 다양화됨에 따라 새로운 무역질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1986년 9월 우루과이에서 1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새로운 무역질서를 위한 우루과이라운드(UR: Uruguay Round)가 선포되었다. 무역에 관세, 비관세, 농산물 및 서비스 등 15개 분야로 나누어서 교섭이 진행되었으며, 1989년 4월에 중간 합의가 성립되었고, 1994년 12월 15일 제네바에서 최종UR무역협정이 타결되었다. 내가 재취업할 당시 우리나라 대기업은 정부의 보호 하에 온실안의 화초일 뿐 국제경쟁력은 아주 약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대기업도 국가간 시장개방과 무한경쟁이라는 경제전쟁의 태풍 앞에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기업에 재취업을 하였으니 스스로 호랑이 굴에 찾아들어간 셈이었다.
내가 취업한 대기업도 자구책으로 ‘Pro-2000’이라는 대혁신 정책을 내걸고 전 그룹이 일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일 먼저 그룹의 전 관리직 이상을 설악산 인근 콘도에 일주일간 합숙시키면서 일본의 시바료타로 원작인 10권으로 된 『언덕위의 구름』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대기업도 정부의 보호아래 수출입을 허가받던 시절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는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산물, 서비스업, 저작권 등 지적재산권 까지 자유스럽게 국가간의 거래를 개방하는 새로운 무역질서이다. 경쟁력이 약한 우리 기업들이 이 거대한 태풍을 극복할 전략의 일환으로 일주일간 자유롭게 책만 읽고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것과 같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라는 의식개혁을 바라는 것이었다. 공무원 생활 30년에 새마을교육과 사무관임용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인 나에게는 1주일간 합숙하며 자유롭게 책만 읽으라는 그 자체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읽은 소설은 사실에 근거한 러·일전쟁의 역사소설이었고, 일본이 승리하는 줄거리였다. 당시 러시아의 국력은 모든 면에서 일본의 10배였다. 누구도 사자와 토끼싸움 같아 일본이 이길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하였다. 일본이 승리한 원인을 찾아서 기업에 접목하고자 그룹의 부서장급 이상을 1주일간 책을 읽고 스스로 의식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임을, 소설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일본이 1858년경부터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선진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개방하였고, 특히 1868년부터 시작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정책은 선진국을 모델로 군사. 조세. 학제. 징병제를 도입하여 서구의 문물을 과감히 도입하였다. 특히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여 혁신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육성하고 등용하였다. 새로운 병기개발과 최신무기를 도입하고 부국강병정책과 자본주의를 도입하였고, 모든 국민에게 기회를 균등히 하여 활력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고 애국심을 유발하였다. 또한 일본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선진국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하였으며, 이를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서 승전할 수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황실의 부정부패와 귀족들의 권위주의로 국민의 불평불만이 높아 개선을 주장하는 시위대에 1000여명을 무차별 살상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사건이 볼셰비키봉기의 시발점이 됨)이 벌어졌다. 국민들의 불신과 국운이 기울어져 정부가 무기력해 가는 노쇠현상이 깊어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일본의 국력은 10배, 일본의 전투함대 능력은 3배를 가지고도 쓰시마 해상전투에서 전투함 38척 중 반인 19척이 격침되고, 4천명 전사에, 사령관 부사령관을 비롯한 6천명이 포로가 되는 참혹한 패전으로 끝이 났다.
이러한 일본이 승리한 원인은, 즉 문호개방과 선진국 문화의 습득활용, 인재육성, 자본주의 도입 부국강병, 정보수집 활용, 사기충천 등 일대 혁신정책의 도입이었다. 기업도 이와 같이 경영에 일대 혁신을 하지 않으면 러시아와 같이 UT태풍에 망할 수도 있다. 반면 혁신을 한다면 국력이 열배였던 러시아를 참담하게 패배를 안겨주고 일본이 승전하듯, 기적 같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였고, 전 관리자들의 의식개혁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은 그룹차원에서 경영혁신 실천사업으로 Clean Office 운동을 추진하였다. 사무실을 Smart하고 깨끗하게 의식개혁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운동이었다. 실천내용은 우선 책상위에 불필요한 참고 도서류, 집기 등을 정리하고, 퇴근 후에는 책상 위에 전화기도 정한 위치에 있어야 했다. 불필요한 것이 없는 깨끗한 사무실가꾸기 운동이었다. 전화기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의자 등은 미리 정해진 위치에 있지 않으면 다음날 출근하면 책상위에는 위반했다는 경고 딱지가 붙어 있었다. 세 번 이상 위반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준다는 경고였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전화기, 의자 등 정위치를 노란 테이프로 표시하고 퇴근 때는 정해진 위치에 있어야 하며, 책상 위를 깨끗이 정돈한다는 것이 과연 혁신에 무슨 도움이 될까?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룹 차원에서 워낙 개혁바람이 세게 부는 터라 불평을 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6개월간 체질화하고 내가 근무한 정부기관을 방문했을 때, 공무원들 책상 위를 보고 나 스스로 놀랐다. 내가 서울에서 1년 간 군대 생활을 하다 휴가를 갔을 때, 투박한 경상도 고향 사투리를 듣는 그 생경함 그대로였다
다음 실천과제는 보관 자료와 서류를 버리고 폐기하는 일이었다. 1년에 네 번 이하 참고하는 서류와 자료는 무조건 폐기처분하라는 것이다. 서류는 반으로 줄었고 각 사무실에 20여개 캐비닛 중 10개만 줄이면, 부서마다 2~3평의 사무실이 확보되면서 서울 중심지의 비싼 임대료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 다음은 전 직원에 대한 전산화교육을 실시하였고 인트라넷 업무환경과 간부들은 인터넷으로 지방사업장간에 전산결재 시스템을 점차적으로 도입하여 종이 없는 사무환경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결재단계를 6~7단계에서 기안자, 검토자, 결재자 3단계로 무조건 축소하게 하였다. 모든 보고서류는 1장이 원칙이며, 보고서류를 1장으로 작성 하지 못하면 기안자가 무능하고, 1장으로 보고받고 업무를 파악하지 못하면 결재자가 무능하다는 논리였다. 모든 회의는 1시간 이내로 단축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고정관념, 관례, 구습, 편법, 안이한 사고는 무조건 버리고 창의적이고 능률적인 대 혁신만이 기업의 성장과 지속가능성, 즉 생존할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인간의 욕구수준은 계속 높아지고 기업간 경쟁이 있는 한 혁신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되어야 할 모든 조직과 개인의 생존전략이 아닌가 싶다. 벌서 25년 전의 내가 제2의 인생을 대기업에 재취업을 하면서 불어 닥친 세계화 국제화의 태풍의 한가운데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업들의 뼈를 깎는 혁신의 현장을 경험했었다. 그러기에 오늘 날 우리나라 기업들이 개방된 세계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외국가정의 안방에 우리 가전제품이 점령하였다. 세계최대 선박건조에서 휴대폰까지, 정보통신 기술과 인터넷 보급률 등 세계 1등제품들이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세계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중심에 내가 있었다는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
다만 우리는 군사적으로 아직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태풍보다 더 위험한 북한의 핵실험에도 놀라는 국민이 없다. 국회에 종북의원이 있음에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명분도 없고, 상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며, 국민을 극도로 불안과 불편하게 하는 공권력에 도전하는 데모에도 우호적이다.
국가안보와 국가정체성에 관한 허리케인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도 무감각이 문제다.
우리의 국력은 북한과 비교할 수 도 없을 정도로 높다. 그러나 국민들의 정신력은 지극히 우려할 수준이다. 국력은 경제력과 군사력의 합(合)에 정신력, 즉 애국심을 승(乘)한 것이다. 정신력이 약하면 모든 것은 제로나 다름없다. 러시아가 일본의 열배의 국력을 가지고도, 월남이 월맹에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비참한 패망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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