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시며 사신 어머님 감사합니다
鐵山 김 종길
“어머니 밭에 나가 일하지 마세요. 힘드시잖아요 ”
“심심한데 집에서 놀면 무엇 하나, 소일도 하고 푼돈도 만지니 안성맞춤이지”
나는 어머니의 속도 모르고 남의 밭에 가서 일하는 것이 싫어서 면박을 주곤 하였다.
1978년 막냇동생이 공릉동에 있는 서울대공대에 다니고, 그 위에 다섯째가 의정부교육청에 다닐 때였다. 어머니는 두 아들 뒷바라지를 위하여 도봉산 밑 시골 같은 동네에 살 때였다. 성남에 사는 나는 토요일마다 퇴근길에 어머니를 찾아뵙곤 했다. 봄가을에는 내가 갈 때마다 남의 밭일을 하시느라 늦게 집에 오셨다. 나는 환갑을 넘기신 어머니가 남의 밭일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의 속도 모르고 단순히 어머니가 평생을 들일을 하셨는데, 서울에 와서까지 남의 밭에 가서 일하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고 무조건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육형제의 맏이로서 직장이 있는 서울 인근에서 다섯째는 고등학교, 막내는 중학교부터 내가 공부를 시키다시피 했다. 아내도 교사였고 우리 애들에게도 할머니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모시고 살았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따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 꼴을 안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모셔오면서 당시 어린 동생도 같이 데리고 와 공부를 시키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는 객지에서 아리고 서린 마음을 달래며, 평생 손에 익은 호미질을 하면서, 얄미운 아버지의 가슴을 후비듯 땅을 파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손맛 들인 호미로 밭을 매면서 가고픈 고향과 그리운 친척, 친구들의 간절한 보고픔을 달랜 것이 분명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남의 밭에 호미질 하는 것이 싫어, 나는 역정을 내면서 말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불효막급이었던 것 같다. 평생을 어머니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은 물론 자식인 나의 말에도 거슬리는 내색을 하지 않는 천사 같은 분이셨다.
아버지의 바람은 40대 초반부터 시작되었고 어머니는 일에 지친 고달픈 삶에 몸도 마음도 지쳐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시기도 했었다. 원래 말이 없고, 속마음을 털어 놓을 데도 없는 어머니가 타들어가는 마음을 아버지의 바람이 부채질을 한 것 같았다. 십리나 되는 곳에서 의사가 올 때까지 사경을 헤맬 때, 불길한 생각이 폭풍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다급함에 들은풍월이 있어 나는 중지를 깨물어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은 것이 시골동내에서 효자라는 별명이 꽤나 오래 붙어 다녔다. 그런저런 연유로 어머니는 물론 호랑이 아버지도 장남인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으셨다. 더구나 집 안팎의 일로 항상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내가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부모님도 동생들에 대한 문제는 거의 일임하다 시피 했다. 어머니는 10여명의 식구들을 위해 보리방아 찧는 것부터 삼시 세끼식사며 손빨래, 한복 다리미 질, 낮에는 밭일까지 밤낮없이 일만 하셨다. 새벽녘에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어머님이라 주무시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일에 지쳐있는 어머님은 결혼 안한 시동생에, 올망졸망 6형제를 키우고 가르치랴, 짝을 지어 주어야하는 등 걱정이 태산인데, 아버지의 바람 까지 더했으니 참담한 심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한 때 어머님의 가슴앓이와 아버지의 바람이 싫어 이혼을 권유 한 적도 있었다. 고향에 갈 때는 십리나 떨어져 사는 그 여자를 가끔 스치기도 했으나, 그 여자에 대한 어머니의 원한에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미웠고 그 여자의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런 파란만장한 어머님이 서울에 와서는 텅 빈 낮에는 온갖 시련을 잊고자 호미를 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위안이 된 것은 나와 며느리는 공무원이었고, 다섯째는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총무처가 실시하는 중앙공무원과 경기도교육청 공무원시험에 모두 합격을 하여 고등학교졸업과 동시에 교육청에 다니고 있었다. 더구나 막내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니 심심산골 시골에 가면 어머님이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버지의 바람은 그 여자가 죽고 나서야 끝이 났다. 어머니도 막내가 대학졸업과 방위산업체 군 대신 취업해 다니면서 서울대학 대학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결혼까지 시키고는 노후에 고향에서 아버님과 함께 사셨다.
그래도 마지막 15년여를 부모님이 함께 여생을 보낸 것이 지금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평생에 불평불만을 밖으로 말한 적이 없는 천사 같은 어머님은 긴 세월에 얼마나 속을 태워셨는지 속병으로 1991년 음력 7월21일에 돌아 가셨다.
그렇게 강경하시던 아버지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 벗어나지 못하셨던 것 같다. 가끔 내가 고향에 내려 가 함께 자는 한밤중에 나를 깨우며“조금 전에 너의 어머니가 왔다 갔는데 너는 못 보았느냐”는 마음 약한 소리를 하시더니, 어머님 가신지 일 년 반을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도 돌아 가셨다. 지금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즈음 직장에 얽매였다는 핑계로 병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고향을 지키는 동생내외에 대한 미안함이 향수와 함께 늘 내 마음 한 구석에 앙금으로 남아있다.
지금 내 나이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보다 더 많고 보니 불효의 죄책감이 더욱 엄습해 옴을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혼이 흠이 아닐 정도로 흔한 일이다.
만약 어머님이 참지 않으시고 이혼을 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조차 하기 싫다.
모든 사람의 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도 부족한 위대한 단어 “어머니”!
참고 참으시며 사신 어머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우리 어머님
김종길
모진 고난 섧은 사연 옷섶에 감싸 안고
한 맺힌 하고픈 말 미소 뒤로 숨기시며
뒤쫓는 가난을 뿌리치기 오십 여년
험한 세상 고생길을 마다 않고 오시느라
꽃같이 곱던 얼굴 세월만큼 주름이네
밤낮으로 일에 묻혀 가는 세월 모르시고
올망졸망 육 형제를 애지중지 기르시며
일가친척 이웃사랑 내 몸같이 하시드니
한 평생 찌든 고생 자식자랑 한 푸시고
백발에 주름진 얼굴 함박웃음 웃으시네
산 넘어 시집올 땐 꿈 많은 소녀시절
가난이 한이 되어 일만하신 새댁시절
많은 자식 길러내려 애태우던 중년시절
자식들 출가하니 고독뿐인 노년시절
치마폭 자락마다 숨은 사연 누가 알리
(1983년 설날 어머님을 생각하며)
사 모 곡
김 종길
고향산천 감싸 안던 그 정은 어디 두고
자식위해 빌어 시든 정화수는 어찌하고
훌쩍 떠난 당신 자리 너무나 큰 흔적에
아무리 통곡해도 서러움만 더합니다.
여름이면 농사 짖고 겨울이면 베를 짜고
동이 트면 호미질에 달이 뜨면 보리방아
평생을 졸라매신 허리띠는 어찌하고
굽은 허리 못 펴시고 훌훌히 가십니까.
나무 때어 밥을 짓고 얼음 깨어 빨래하고
등잔불에 다리미질 밤새운 바느질에
그 흔한 가전제품 쓰시면서 사셨으면
불효자식 한이 되어 울지는 않았지요.
가신 곳은 천당이요 사시는 곳 극락이니
이 세상 한이 되신 가난을 물리시고
밤낮 없는 자식 걱정 훌훌히 털어 시고
영생토록 부귀영화 한없이 누리소서.
(1991년 음력 7월 23일 1주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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