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과 버들강아지 / 김종길
계간 한국작가 신인공모 당선 작(2012.11.3)
등산길 양지바른 곳에 피어있는 진달래꽃 한 움큼을 입에 넣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다녀오다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그 맛이 아니었다. 봄날 나른한 하교 길은 유난히 배가 고팠고 책 보따리가 무거워 힘이 빠졌다. 십리나 족히 되는 그 길에 반가운 것은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향긋한 진달래 꽃과 개천가 버들강아지의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봄이면 언제나 보리 고개를 겪었던 우리는 지구상에서 인도 다음으로 못살았던 나라였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봄이면 진달래와 버들강아지는 지천으로 변함없는데 긴 세월에 내 입맛이 변 한 것일까.
지금 거리 슈퍼마켓엔 먹을거리가 쌓여있다. 계절에 관계없이 사시사철 과일이 넘쳐난다. 골목마다 음식점 술집이 즐비하다. 60여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60여 달러에서 약 400배인 23,000여 달러나 되는 경제대국을 이룩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태산처럼 높은 보리 고개를 넘기 위해 이역만리 서독 지하 1000m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에 파견된 우리들의 누이들은 간호사로 일하며 외국인 시체를 소독하면서 눈물로 돈을 벌었다. 남의 나라 월남 정글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들의 피와 땀, 목숨을 건 대가는 고향의 형제자매와 조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들은 그 높은 보리 고개를 없앴고 그리고 도 열심히 일했다.
부지런했던 지난날이 있었기에 지금은 외국 노동자가 한국을 돈 버는 기회의 땅으로 찾고 있다. 외국 근로자 4~50만 명이 힘든 일을 열심히 하여 번 돈을 자기 나라로 보내고 있다. 다른 나라 아가씨들이 한국에 시집오는 것을 행운으로 알고 있다. 세계에서도 단시간에 이렇게 위대한 나라를 만든 것이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 모든 영광은 보릿고개를 진달래, 버들강아지로 버텨냈던 우리 민족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성해야 할 점도 많다. 보리 고개의 한 맺힌 세대가 자식들에게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에 자식들을 배만 불려놓고 철없이 키웠다. 배부른 풍요가 노숙자와 실업자를 만든 문제가 되고 말았다. 넘치게 쓰고 버리는 것을 미덕으로 알게 만들었다. 눈 높이만 나추면 천지가 일자리고 먹을 것이 넘처난다.
오래 전 일본에 출장 겸 관광을 간적이 있다. 기업체를 방문했을 때 주문한 도시락으로 식사접대를 받았는데 밥 한 톨 버릴 것이 없었다. 동경 신주쿠에 교포음식점에 가서 설렁탕을 먹을 때였다. 깍두기를 추가하면 500엔 상당의 식대를 더 주어야했다. 남는 것이 없으니 버릴 것도 없었다. 깍두기 몇 조각에 5000원 상당의 대금을 추가로 주었으니 아까워 버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한 후로 음식물 쓰레기가 줄어들긴 했지만 이제 선진국 대열에 서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점검해 봐야겠다. 지금도 후진국에서 굶주리는 인구가 약 10억 명이란다. 같은 민족인 이북은 이 시간에도 먹을 것을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 하는 동포가 수십만 명이다.
음식쓰레기로 발생하는 온실 가스는 지구를 병들게 하고 기후변화로 우리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그 쓰레기 처리비로 우리의 혈세 수천억을 낭비하고 있다. 보리 고개의 한풀이 인지 손님접대의 후한 미풍양속인지는 알 수 없으나 푸짐한 상차림으로 먹다 남는 음식을 버리는 일은 삼가야겠다.
세월이 변하고 입맛이 변했어도 그 옛날 내 고향 진달래꽃과 버들강아지의 향기롭고 달짝지근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 하면 입에 침이 도는 잊지 못할 추억의 먹을거리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슬픈 추억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아끼고 절약해야겠다.
보리고개 다큐멘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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