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목록 1호. 꼬마 경영자
햇볕 쨍쨍하던 하늘에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다. 비바람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앞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다. 거센 비바람에 손바닥처럼 잘 알던 산골짜기였건만 한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우산도 우비도 있을 수 없던 시절 초등학생인 우리들은 비를 흠뻑 맞으며 각자의 소를 찾아 헤맸다. 옷이 젖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를 찾는 것이 시급한 일이였다. 소를 찾은 친구는 다른 친구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를 몰고 집으로 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 집 소 금동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해는 저물어 가고 소를 찾지 못한 책임과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폭풍우에 무서움이 더해 갔다. 엄습하는 공포에 떨던 나의 비명 섞인 울음소리는 좁은 산골자기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50년대 우리농촌에서 소 한 마리는 재산목록 제1호였다. 소는 논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교통수단으로 장정 4. 5명의 몫을 해내는 일꾼 이었다. 그리고 암소는 2년에 한번 정도 송아지를 낳았다. 송아지를 키워서 팔면 논밭을 구입하거나 아들딸 시집장가 보내는 살림밑천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특히 소는 가난한 농촌 대학생들의 학자금 마련의 일등공신이었다. 오죽하면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 했을까. 그러니 가난한 농촌에서는 소가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것을 어린이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재산목록 제1호를 키우는 목동이요 경영자가 되었다.
열 살 정도면 농사일에 바쁜 부모 대신 아침에는 소죽을 쑤어 먹이고 학교에 갔었다. 학교를 마치고는 집에 오면 제일 먼저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좁은 곳에서 무더위에 허덕이던 소는 방목장으로 가자고 눈을 껌벅이며 반겼다. 스스로 챙겨 먹어야 하는 때늦은 점심도 먹을 것이 부족해 굶기 일쑤였다. 허기진 배를 채우지도 못하고 소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방목장으로 향하곤 하였다. 같은 동네 친구들과 약속을 하지 않아도 소를 몰고 방목장에 모였다. 동내에서 우측 산기슭을 돌아가면 방목할 수 있는 산이 있었다. 방목장은 동북쪽과 서남쪽으로 산길로 연결되어 다른 동내 나무꾼과 나그네가 수시로 넘나드는 산길 요충지 주변에 있었다. 가끔 놀이에 정신이 팔리면 좋은 날씨에도 소를 찾지 못해 당황하기도 하였다.
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그날도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갑작스런 폭풍우 천둥번개를 만났다. 소는 지나가는 나무꾼이 몰고 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내려간 친구들에게 내 소식을 듣고 올라온 부모와 동내사람들을 보고서야 나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기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소는 내가 스러진 장소에서 멀지 않는 곳에 찾었다고 했다.
그 이후도 소를 몰고 방목장을 찾았고, 제산목록 1호를 키우고 경영하는 내 무거운 책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내소는 송아지를 두 번이나 낳았고 막내 고모 시집가는 밑천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뇌리에 또렷이 남아 있는 사건이었다. 기절을 할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감과 공포에 질렸던 그 사건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립심과 용기, 도전과 결단력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 부모들이 아이들 공부를 위해 실틈 없이 학교와 학원을 다니게 하고 있다. 또한 넘쳐나는 물자와 풍족한 먹 거리로 부족함도 아쉬움도 모르고 자라게 한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자립심도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기를 틈 없이 오직 공부만 하기를 원한다. 공부이외 모든 것은 부모가 다 해결해 주는 과잉보호가 문제다. 이렇게 자란 청소년들이 하나가 된 지구촌의 치열한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걱정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 들 중에 76%가 용돈을 부모에게 의존하다. 학자금은 93%, 결혼비용은 87%, 집 마른에 74%에 해당하는 부모가 주택자금을 부담하고 있단다. 더구나 연간 자식의 사업 등을 위해 담보로 제공되었든 부모가 사는 주택 8만호가 경매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 몰리는 서글픈 사연이 벌어지고 있단다. 오늘날 청소년들을 과잉보호로 키운 업보라 기성세대의 책임이 무겁다.
내 자식과 손자들도 나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초등학교만이라도 시골에서 보내고 싶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시골에 살지 않으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손자들과 함께 눈을 껌벅이며 바라보는 소를 방목하고, 가재잡고, 송기 벗겨먹으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상상만이라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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