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길상호
묵언(默言)의 방 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 찻잎 덜어낼 때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서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소리도
다관(茶罐)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헹구 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 번 먼 강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시인 길상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여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2004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문학세계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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