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솜씨/수 필

나는 폭군이었다

철산. 케네디 2013. 5. 24. 00:03

 

                                             나는 폭군이었다

                                                               김종길

 

 

나는 화가 머리 끝 까지 치밀어 올랐다. 학교성적이 이게 뭐야. 밖으로 빨리 나와. 옷 다 벗어. 나는 고향집 뒤뜰 우물에 얼음을 깨고 동생들에게 얼음 물을 퍼 부었다. 지금 생각하면 폭군의 행패였다. 내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귀향했을 때 초등학교에 다니는 셋째. 넷째. 다섯째 동생 셋의 성적이 내 기대에 훨씬 못 미쳐 화를 참지 못하고 벌어진 일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家業인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중학교 진학을 못하게 했었다. 그 때 할머님께 일종의 반항심에서 내가 어떻게 하드라도 동생들은 공부를 시키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동생들의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공부에 한이 맺힌 나머지 그 추운 겨울에 얼음물을 동생들에게 퍼 부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무 심하게 한 죄책감에 나도 옷을 홀랑 벗고 그 우물물을 뒤집어 섰다. 그 것 뿐이 아니었다. 철도 들지 않는 막내 동생이 울면 사정없이 때리곤 했다. 겁에 질려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참는 것을 힘들어 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농사일에 바빠 6형제를 돌볼 틈이 없었다. 그러니 동생들의 군기를 잡는 것은 큰형인 나의 몫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동생들을 때리던 얼리던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 여동생이 없는 집안은 늘 삭막했다. 제대 후 취업도 안 되고, 고된 농사일에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니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동생들이 조금만 잘 못하면 폭군처럼 분풀이를 한 것 같다. 제대 일년 후에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할머니와 약속대로 밑으로 네 동생들은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

 

 

 

서울에서도 동생들에 대한 나의 폭군의 위협은 여전하였다. 고등학생인 다섯째 동생이 잘못한 것이 아닌 데도 친구와 공동책임으로 며칠간 정학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여지없이 야구 방망이가 동원되었으니 폭군의 질타를 도저히 면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폭력으로 동생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괴로워했을까. 생각하면 너무나 미안하고 50여년이 지남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응어리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하고 있던 50년대 초반이었다. 우리나라는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으니 농촌의 보리 고개는 굶기를 밥 먹듯 했었다. 그럼에도 칠십여 호가 살고 있는 시골 동내에 막걸리를 파는 주막이 세집이나 되었고 퇴기(退妓)가 운영하는 술집에는 작부(酌婦)까지 있었으니 동내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15세 전후인 또래들을 동원하고 동내 부인들의 후원을 받아 구판장을 만들었다. 술은 물론이고 웬만한 생필품과 잡화도 구비하였다. 구판장에 있는 물건은 시장에서 구입을 금한다는데 부인들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는 5일마다 서는 장날에는 시장에 다녀오는 동민들의 장바구니를 조사했으니 이 또한 법에도 없는 폭군이나 할 짓이었다. 장사가 될리 없는주막집 퇴기와 일부 어른들의 반발과 욕을 많이 얻어 먹었다. 그러나 동내 부인들은 작부를 쫒았냈고 물건 값도 샀으니 대 환영이었다.

지금의 잣대로는 보면 지탄받을 행동이었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그런대도 고향에는 물론 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했으니 송구할 뿐이다. 제사나 명절 때 동생들을 만나면 마음은 아닌데 아직도 정답고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있어 폭군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 일까.

 

 

 

이제는 동생들도 정년퇴직을 하고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 있는 나이가 되었다. 넷째 동생은 전기기사1급과 전기공사기사1급 자격이 있으니 정년 후에도 재취업을 해서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다섯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에 합격했었다. 지난해 말 교육청 경영기획실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임을 하고, 주택관리사 자격으로 재취업하여 보람있게 살고 있다. 나와 20념 나이 차이로 자식같이 사랑한 막내 동생은  서울대학 전자공학과 학사. 석사 출신으로 국립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불혹의 나이로 뺑소니차사고를 당하는 애통한 일도 있었다.

 

 

 

시대가 많이 변하여 가정과 학교에서도 체별을 금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른이나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설 자리가 없어졌다. 합리적인 체벌마저 금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 정서로 보면 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며 동생들을 키웠다. 그러나 동생들은 보통사람으로서 반듯하게, 주변에 피해나 허물없이 직장을 마친 것도, 그리고 재취업을 한 것도 폭군의 영향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죄책감의 일부라도 면하려 변명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