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전쟁의 탄흔(彈痕)
鐵山 김 종길
탕. 탕. 탕 드르륵 하는 총소리가 깊은 산골의 적막을 깨트렸다. 돌담에 기댄 자치대원들이 갈기는 총소리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휴전 다음해 음력 9월, 유난히 달이 밝은 보름날 우리 집에서 벌어진 공비와 자치대 간의 교전이었다. 그 와중에도 자치대원들이 우리 집에서 총을 쏜 것을 공비들이 알고 보복하면 큰일이란 생각에 “작은아버지 빨리 나가요” 소리치며 탄피를 주워서 마루 밑으로 던져 숨겼다. 공비들도 나만큼 혼이 났는지 달아난 것 같았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산골에 공포심은 더해갔고 죽음만큼 긴긴 밤도 새벽은 밝아왔다.
휴전 후 북한군의 패잔병과 빨치산들로 구성된 공비들은 토벌(討伐)을 피해 높고 깊은 산에 근거를 두고 수시로 민가에 출몰하였다. 우리 집 인근 밀양시와 청도군 경계에 930m나 되는 화악산에 근거를 둔 공비가 수시로 출몰하여 양곡을 탈취하거나 젊은이들을 납치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마늘 밭에 낮선 청년이 마늘을 훔치는 것을 보고, 동네 어른이 혼을 내 준 일이 있었는데 그 놈이 공비였다. 달이 밝은 보름이면 가끔 내려 와 보복을 한다면서 양곡과 반찬거리를 탈취해 가곤 했었다. 이에 대응하여 6. 25전쟁에 전투경험이 있는 작은 아버지를 비롯한 제대군인이 주축이 되어 자치대를 구성하였다. 자치대는 소총으로 무장하고 밤이면 공비의 침투가 예상되는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도 산으로 통하는 길목이 잘 보이는 우리 집 돌담에서 공비의 침투를 감시하던 자치대와 공비 간에 벌어진 치열한 접전이었다.
밀양은 6. 25전쟁 때도 낙동강 전투의 격전장인 창녕지역에서 포성은 들려 왔으나 전쟁터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방 구들 밑을 파내고 양곡과 중요물품 등을 묻고 피난 준비까지 하였었다. 다행히 직접 피해는 없었는데, 그날 공비들의 침투로 총탄이 오가는 전투현장을 창호지문 하나 사이에 두고 경험을 한 것이다.
작은아버지는 결혼 후 바로 우리 집 옆에 새집을 짓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6. 25전쟁이 터져 군에 입대를 하였다. 당시 나무가 땔감이던 시절이라 초등학교 5학년인 내 바로 밑에 동생이 학교를 그만두고 작은아버지 집에 땔나무를 해야 하는 나무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참전했던 작은아버지는 휴전 60주년이 되는 해에 돌아가셨고, 숙모도 2년후 지난 가을에 돌아가셨다. 삼촌은 6. 25참전 기록이 면사무소에도 없고, 훈장과 군대사진 등은 화재로 소실되어 참전사실을 증명할 수 없어 참전용사 수당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숙모의 문상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늘날 같이 정보화 시대에 면사무소에서 참전용사를 기록이 없다고 팽개치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참전용사인 작은 아버지와 가족들은 작은 명예와 혜택을 누리지도 못하고 전쟁의 아픔만큼 또 다른 상처를 안고 돌아 가셨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작은 아버지는 전쟁 후 제대를 하고 귀향을 하였으나 땔나무를 하던 동생은 복학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동생은 전쟁의 탄흔을 간직한 채 부산에서 동국제강에 근무하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 동생은 통신교육을 통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산 UN묘지 인근, 큰 대연중앙교회에서 장로로 집무할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축복 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부산동생의 딸 질녀들이 대학생일 때 큰 아버지인 나를 찾아 왔었다.
“큰아버지는 대학교까지 졸업했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했는지” 따지듯이 묻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우리형제 중 넷째 동생도 고등학교를 나와 전기기사, 다섯째는 방송통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막내 동생은 서울대학교 대학원까지 나왔다. 그리나 부산 동생만은 달랐다. 질녀들의 의문은 당연하였다. 밑으로 세동생들은 내 영향으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나와 두 살 차이인 부산동생은 내가 어떻게 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 과정을 질녀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동생과 질녀들의 가슴에 박힌 전쟁의 아픈상처가 너무나 크게 다가와 지금도 내 마음의 그늘을 지울 수가 없다.
부산동생은 이미 숙모의 문상을 다녀가고 없었다. 상주인 4촌에게 부산동생이, 군에 간 삼촌댁을 위해 초등학교를 그만둔 사실을 이야기 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며 사촌동생들도 깜작 놀랐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 내외분도 생전에 전쟁으로 인해 부산 동생이 평생을 안고 사는 그 한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니 애도에 앞서 야속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농장을 하는 사촌은 그걸 알았다면 철따라 나오는 농산물이라도 보냈을 텐데 안타까워했다.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니 “부산형님에게 앞으로라도 각별히 대하라”고 당부 했다. 지금은 그 사실을 보고 겪었던 사람은 부산동생과 나 혼자라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났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했는가? 중앙부처, 더구나 국방부와 관계되는 일을 수년간 했던 내가 삼촌의 명예를 찾아드리지 못하고 참전용사의 수당도 받지 못하고 사셨다는 사실마저 몰랐단 말인가? 부산 동생은 전쟁으로 받은 그 아픔을 나는 알고 있었으면서. 4촌들에게 미리 말하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러고도 국방부나 육군본부를 방문해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였다. 반년이 지난 후에야 인터넷으로 민원을 내고 3일만에 참전용사임을 확인하는 서류를 육군본부로 부터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을 늦장을 부렸다. 내 무관심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가?
우리 집은 6. 25전쟁에 작은아버지만 참전하였고, 아무 피해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의 탄흔이 깊이 박혀 있음에 놀랄 뿐이다. 아직도 동족끼리 총 뿌리를 겨누는 분단조국, 300만 명의 전사상자 들, 1000만 명의 이산가족 들, 16개국 참전 용사 들, 전 국토에 박힌 6.25의 탄흔이 없어질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인터넷에서 수집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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