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제일 한직인 병기계를 원했다.
철산 김 종길
“김병장님 저 병기계에 갈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이제 막 부대를 배치 받고 가는 황보**이병의 부탁이었다. 우리는 고참병인 나와 신병인 황보이병이 함께 용산 미8군사령부에서 미부산지구사령부(하야리야 부대)로 전속가는 군용열차를 타고 있었다. “병기계는 제일가기 싫어하는데 왜 갈려고 하니?”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병기계는 총기를 보관하면서 미군 사병들이 개인 총기를 닦으려 오면 총을 내주고 받아드리는 일을 하는 한직이었다. 병기계 담당자는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오기를 바라는 자리라 배속에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속으로 이상한 놈도 다 있다 싶었다. 나는 이미 국방부에서 파견된 김 대위와 같이 부동산(부대부지)관리를 하게 되어 있었다. 황보 이병은 신병이라 어디에 배속될지 정해져 있지 않는 상태였다. 하우스보이 출신이라 미군부대의 생리를 잘 아는 터라 고참병장인 나에게 부탁을 하면 해결될 것을 아는 것 같았다.
황보 이병은 용산에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를 한 이야기와 집안 이야기, 나는 농촌에서 육형제의 맏이라 대학을 마치면 살림이 거들 날 것 같아 3학년을 수료 후 군에 입대했고, 내가 다닌 대학이 야간부가 있어 졸업할 요량으로 전속 가는 이야기 등 지루할 틈도 없이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정식으로 부대에 야간대학을 다니겠다니까 선진국 군대답게 학교 가는 날은 공식적으로 운전기사가 딸린 짚 차가 배차되어 내 평생 가장 호사를 누리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는 예상 대로 무리 없이 병기계 배치되었다. 배치된 그 날부터 미군사병들이 총기를 닦으러 오면 하우스보이 출신답게 아양을 떨면서 “앞으로 총기는 내가 책임지고 닦아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에 미군 사병들은 대환영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300여명이 넘는 미군사병이 봉급날에 총기청소 때문이 아니라 황보 이병에게 선물을 주기 위하여 병기계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다. 그들은 양담배 한 보루, 10불 정도의 현금, 아니면 선물을 사들고 병기계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가 부대에 배속된 후 몇 달 지나지도 않아 부대 내 미군과 카투사 할 것 없이 대 스타가 되었다. 왜 병기계를 원했는지 그 답은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약 50여명인 카투사는 매달 한 번씩 푸짐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당시만 해도 피액스(PX)에 탐나는 물건들은 그에게 부탁하면 살 수 있었으므로 그는 카투사들의 계급에 상관없이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미군 사병봉급보다 더 수입이 좋은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게 내 덕이라면서 학기초에는 대학등록금을 보태주었고, 거절하는 나를 무색하게 수시로 용돈을 사물함에 몰래 넣어주는 잊지 못할 후배가 되었다. 당시 그것이 군에서 정당한가? 부정하냐? 제제의 대상이냐? 하는 논의는 있었으나 정식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 제대 후 나는 공직생활 30년, 대그룹에서 7년을 근무하면서 황보 이병처럼 한직은 물론 남들이 싫어하는 부서라도 모든 노력을 다해 최고의 부서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결과 예산분야의 전문가라는 입소문에 법무부, 과학기술부, 공업단지관리청 등 3개 부처를 자의반 타의반 스카우트로 전출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한직이든 부서를 새로운 이슈가 되었던 산업스파이방어업무, 소비자상담, 정보수집업무를 스스로 담당하면서 역동적이고 각광 받는 부서를 만들 수 있었다.
1997년 정년퇴직 후 우리나라 기술수준이 높아지자 산업스파이가 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방지하는 개인연구소를 운영하였다. 당시는 기업은 물론 정부마저도 산업스파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주로 대기업체 직원들을 모집하여 산업보안교육을 50여회 실시했었다. 당시에는 대기업마저 산업보안부서가 별도로 없었고, 담당직원마저 예비군중대장이 겸임할 정도로 기업에서는 중요시 하지 않는 한직이었다. 그들에게 앞으로 기업의 생존을 좌우할 중요기술을 보호하는 산업보안업무가 기업의 핵심업무가 될 것이 확실함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교육수료식에는 반드시 황보 이병의 사례를 들면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일등부서를 만드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당시는 경찰청마저도 산업스파이전담업무를 신설하는 단계였다. 개인연구소임에도 본청 및 지방경찰청 직원들에게 실비이하의 교육비를 받으며 총경 등 30여명의 교육수료와 전국경찰청 순회교육을 실시한 연유로 2007년 경찰의 날에 감사장을 받기도 했었다. 실리도 없이 한국산업보안연구소를 12년간 운영하면서 정부도 도외시 한 산업보안업무의 기반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삼성, LG, KT등 대기업의 첨단기술보호체제확립에 도움을 주었으며, 산업보안관리사를 양성하는 등 우리나라 산업보안업무를 개척한 공로로 2008년에 산업자원부(상공부)를 떠난 18년만에 공로상을 받은 자존감이 나를 버티게 하였다.
지금도 그 당시 수료생을 만나면 "다른 교육내용은 기억에 없는데 황보 이병의 사례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단다."
그의 사례를 통해 나의 생활철학으로 자리매김하였고, 황보 이병의 사례를 전할 수 있어 교육은 더 보람되었다.
경찰청 외사국 워크숍 (2006.9.11)
계룡대 강의 (육.해. 공군본부보안장교. 2005.9.27 )
'나의 솜씨 > 수 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음운동 샤방샤방 (0) | 2013.09.17 |
---|---|
6. 25 전쟁의 탄흔(彈痕) (0) | 2013.08.17 |
나는 폭군이었다 (0) | 2013.05.24 |
저 아름다운 벚꽃도 분노의 대상 이었다 (0) | 2013.05.07 |
산이 정말 싫었는데 (0) | 2013.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