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솜씨/수 필

내 인생의 Mentor (1)

철산. 케네디 2014. 4. 26. 08:28

 

                                      내  인생의 Mentor (1)

                                                           鐵山  김 종길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 없으시면 내년도 예산안심의를 마치겠습니다.” 청장님의 회의 종료선언에 아무른 이의 없이 예산안이 심의가 끝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브리핑차드를 정리 하려했다. 그 순간 배상욱 청장님은 나에게 조용히 “잠간만 기다려요....” 하는 말에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간부들은 사무실로 뒤돌아 가고 회의실에는 청장님과 나 단둘이만 남았다.

 

  1975년 5월경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정부조직이지만 당시는 마산과 이리수출자유지역을 직접관장하고 구로공단과 울산, 창원과 구미전자 등 국가 관리공단과 16개 지방공단을 지원 육성하는 공업단지관리청 예산담당관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6월전에 경제기획원에 제출해야 할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내용을 청 내 과장급 이상의 간부회의에서 심의를 하는 자리였다.

간부들은 돌아간 텅 빈 회의실에 청장님은 다시 예산안차트를 직접 펼치면서 미안하다는 뉘앙스로 “김 사무관 나하고 다시 검토 좀 합시다.” 그 때부터 예산안 내용을 한 장 한 장 차트를 넘기며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2시간이상을 한 번도 언짢은 기색 없이 다정한 형제같이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수정작업이 계속되었다.

  청장님은 사무관인 나의 인격을 존중해서 차장이하 여러 국장 앞에서 나의 체면을 손상할 수도 있는 지적을 하는 것보다 단둘이서 본인의 뜻과 나의 의견을 물어 예산안을 수정 보완하는 사려 깊은 부하사랑의 배려였다.

  그분은 외모도 영국신사 형으로 헌칠한 키에 인자한 얼굴에 학자요 선비 같았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모든 부하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 후 특허청장, 상공부 차관, 체신부장관을 하신분이다. 체신부 장관 당시 5. 18 광주항쟁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광주지역의 시외전화를 차단하라는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국민의 통신의 자유를 보장해야 된다며 국민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이를 이행하지 않으시다 장관직에서 물려난 소신 있는 분이였다. 그 후에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삼성물산사장과 삼성생명회장으로 스카우트할 정도로 능력과 인품을 갖춘 자타가 존경 할 만 한 분이었다.

 

 

  당시는 정부예산이 경제기획원에서 예산안 조정은 물론 국회에서도 예산심의가 시작되면 부처의 예산담당자는 통금을 피하거나 예산 계수 조정 작업을 하느라 여관에서 밤을 새우며 퇴근을 할 수없는 날이 예사였다. 미련하게도 예산담당업무를 10여년을 말없이 하고 얻은 별명이 “예산 통”이라 불렸다. 그래서 경제기획원 과장 소개로 공업단지관리청 예산담당으로 전출하게 된 동기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내 가 가장 존경하는 배상욱 청장을 만나 본인의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 평생행동의 Mentor를 덤으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국회에서 예산관계로 저녁 식사 때를 놓치는 날에는 “김 사무관 우리 저녁이나 먹고 갑시다”하면서 미대사관청사 뒤 허술한 선술집 쪽 의자에 앉아 때 늦은 저녁을 순댓국에 막걸리 한잔을 나누면서 성남에 사는 나의 먼 퇴근길을 걱정하시던 소박한 분이였다. 시대변화로 1977년 초에 공업단지관리청 대신 상공부 특허국이 특허청으로 확대 신설되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전 직원이 자동으로 특허청으로 발령받기 하루 전날이었다. 특허청 신청사인 강남 제일생명빌딩에서 현장 답사를 마치고 청장님 차에 동승하여 내일이면 문을 닫을 중구 저동에 있는 공업단지관리청 청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며칠을 두고 개인문제로 고민하면서 차마 청장님께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을 차안에서 틀어 놓았다. 이미 특허청 발령이 정해진 상태에서 상공부로 가기를 원한다는 나의 청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미 정해진 발령을 수정하는 혼란을 예상하면서도 “그 동안 예산업무에 고생이 많았지”하시면서 상공부로 전출할 수 있도록 특별히 조치한 분이라 내 인생에 큰형님 같이 자상한 분이었다.

 

  1년 후 다시 상공부차관으로 오셨고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 내가 한직에 있음을 알고는 다른 부서로 옮기게 하는 배려도 하셨다. 그 후 내가 다른 기관으로 떠나면서 인사차 사무실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였고 그분하고 직접만남은 그 후로 없었다. 그분의 인품이 사사롭게 만남을 싫어하는 분이었고 나도 사적인 일로 그 분의 고귀한 인품에 흠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5. 18사태 때 대통령의 명령을 거절하고 장관직을 물러날 때도 나는 그분의 용기에 한없는 박수를 보냈었다. 그분은 나에게 말없이 Mentor의 자질인 국민을 사랑하는 애국심, 부하직원에 대한 인격적인 배려와 사랑, 서민적인 소박한 인정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내 인생에 그분이 Mentor임을 자랑스럽고 긍지를 가지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5000만 국민을 울리고 가슴 아파하는 300여명을 희생시킨 세월호 사건, 분명 인재라고 볼 수밖에 없는 침몰 사건으로 온 나라가 공황상태에 빠졌다.

세계조선업체 능력 1위에서 6위까지 독차지 하고 있는 나라에서 후진국에도 있을 수 없는 낮 뜨거운 사건에 벌어져 국격이 무너졌다. 단기간에 최빈국에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급속한 물질문명만 발달하였지, 우리들 자신의 정신문화를 도외시한 업보가 엄청난 사건으로 분출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화수준이요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총체적 부실과 법 이전에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세월호의 선장이하 다수 선원들의 행동을 보고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이미 고인이 된 나의 Mentor인 그분과 같이 나보다 국민과 약자를 우선 생각하고 배려하는 선장 이었다면 그 많은 학생과 승객을 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희생된 어린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미안하고 죄스러움에 명복을 빌면서 나의 Mentor 그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총무처시행  모범공무원 표창 전수식(좌측 첫번째: 배상욱 청장)

 

 

 

                                                                     상우회지(Good Friend) 2015년 겨울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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