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솜씨/수 필

아버지는 농부요 마부였다

철산. 케네디 2014. 8. 2. 13:26

               

                            아버지는 농부요 마부였다

                                      -아름다운 말과 친절은 축복의 그릇을 키웁니다-

 

                                                                          鐵山 김 종길

 

 아저씨 이게 무엇입니까? 일을 하시려면 똑 바로 하셔야지..... 경비실에서 큰 소리가 났다.

30대 후반 아주머니가 아버지 나이 보다 많은 70대 중반의 경비원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얼굴은 반반한 그여자가 몇 층 몇 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 분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상대방을 무시하는 뜻한 태도가 내 마음에 벗어 난지 이미 오래되었다.

70여년을 살아온 경험으로 볼 때 성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얼굴은 받쳐주는데, 지식이나 과거 전력이 수상해 보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경비원 아저씨는 연신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였다. 그러자 젊은 여자는 더 기세가 등등해 경비원을 몰아세우는 것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 경비원은 내가 잘 아는 초등학교 교장이셨던 분으로 교양과 품위가 있는 분이였다. 경비원 아저씨가 무안해 할 가봐 나는 그 자리를 얼른 피했다.


 경비원 아저씨는 아파트단지 옆 놀이터 산바람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전교조를 보는 시각이 나와 비슷해서 그분의 경력과 인격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는 알 바 없었으나 그 분은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할 분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것을 죄인을 다루듯 큰 소리로 어른을 나무라는 것은 교양 없는 사람이거나, 자기과시 아니면 스트레스를 푸는 비정상적인 소행이 분명해 보였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 예의와 상식에 어긋나게 어른을 무시하는 언행은 더불어 살아가기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농사철에는 농사일에 매달렸고, 한가한 겨울에는 소달구지에 땔나무 짝을 실고 읍내 시장에 팔아 나와 동생들 월사금은 물론 어려운 농촌살림에 보태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신 6남매의 장남이었고, 올망졸망 자식 6형제까지 키운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러 받는 유산도 별로 없었으니 농사일과 소달구지로 나무장사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나무를 팔로 가는 날에는 새벽 5시경에 산골에서 3십리나 되는 읍내까지 먼 길을 소달구지를 몰고 가셨다. 읍내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다니며 까다로운 젊은 아주머니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큰 나무 짝을 좁은 부엌에 들여 놓는 것도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든 어느 날 비좁은 부엌에 큰 나무 짝을 들여놓다가 값이 좀 나가는 그릇을 떨어뜨려 깨진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이웃이 시끄러울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깨진 그릇을 변상하라고 난리를 부렸었다. 그릇 값 대신 나무 값을 받지도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단다. 그 길로 팔지 못한 나무 두 짝을 도로실고 삼십 리 길을 되돌아오면서 주막에 들려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애매한 어머니께 투정을 부려 섰다. 그날 이후 2일간이나 두문불출하시고, 달포 간 생업인 소달구지를 보기도 싫다며 내 팽개치셨다. 나무 값보다 그 젊은 여자의 앙칼진 억지와 수모를 참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다.


  내 고향 시골동네는 김가들의 집성촌이었고 아버지는 가문의 중견어른으로 잘못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 좀 급하셨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내가 한 단락을 마자 읽고 나가려고 한두 번 불러도 나가지 않으면 문을 활짝 열고 내가 보는 책에 낫 끝으로 찍어 마당에 내팽개칠 정도로 성질이 급하셨다.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분명하여 어린이들의 잘못도 호통을 치니 별명이 호랑이 아저씨였다. 아이들이 골목길에 놀다가도 아버지가 나타나면 “호랑이 뜯다”하며 피할 정도였다. 그런 분이 젊은 아주머니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두문불출에다 가정형편과 상관없이 나무장사를 팽개친 것은 당연하였다. 그 아주머니가 아버지 가슴에 평생 빠지지 않는 대못을 박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후 아버지는 "남의 가슴에 못 박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소일삼아 하시는 경비원 아저씨도 그 여자의 앙칼진 말이 가슴에 못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국의 명문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창설자이신 하워드 켈리(1858~1943)는 산부인과 분야에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의사였다. 그가  고학생으로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외판원시절에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방문한 가정에 물 한잔만 달라고 했다. 허기짐이 역역해 보이는 그에게 우유 한 컵을 건 내 주었고, 그대가로 돈을 주자 “어머님이 친절은 대가를 받지 말라고 했다”는 소녀의 말 한마디를 그는 평생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십 수 년 후 부인이 된 그녀는 불치의 중병에 걸려, 마지막 수단으로 최고로 유명의사를 초빙하여 치료하기로 하였다. 초빙의사로 간 분이 바로 하워드 켈리였다. 그는 부인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온갖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 치료한 결과 완쾌하였다. 최고의 의사에 초빙료까지 엄청난 치료비를 예상하였다. 배달된 치료비청구서에는 “한 잔의 우유로 치료비는 이미 다 받았습니다. 평생에 짐이었던 우유 값을 이제 지불하였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완쾌를 축하 합니다”라는 감동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 “대가를 받으면 안 된다”는 그 친절한 말 한마디가 불치의 병에서 생명을 살렸고, 허기에 지친 그에게 우유 한잔의 값어치는 수억 원의 치료비보다 더 가치가 있었었다.


 

 또한 미국 네바다주의 사막 한 가운데 낡은 트럭을 몰고 가던 젊은 '멜빈 다마'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타시죠!"

"라스베이거스까지 태워다 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그리고 노인의 차림을 보고 차비에 보태라고 주머니를 털어 25센터를 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그에게 명함 한 장을 달라기에 주고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몇 년 후 1976년 백만장자 영화제작자<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이란 기사와 함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유언장에는 하워드 휴즈가 남긴 유산의 16분의1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있었다. 그의 유산 25억 달러 중에 1억 56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대략 2,000억원이 ‘멜민 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돈벼락을 맞았었다. 무심코 배푼 친절과 25센트가 6억 배가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아름다운 말과 친절은 하면 할수록 내가 받을 축복의 그릇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경비원 아저씨를 보면서, 가슴에 못을 박고 사신 호랑이 아버지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Times Korea 주최 전국노년예술제 문학부문 특별상 수상작품 (20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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