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에 살어리랏다(1)
-살기 좋은 성남. 우리 손으로-
광주대단지 사건이 있던 일 년 반이 지난 1973년 3월 부인이 성남제일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으니 불가피 성남으로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동 산중턱에 있는 제1초등학교 앞에 방을 얻었다. 여름의 장마와 겨울에는 얼었다 녹았다 하는 길바닥은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생활용수인 물도 공동수도에서 길어다 먹어야하는 등 생활환경이 엉망이고 열악하였다. 더구나 생계의 기반인 일터는 서울이고 유일한 교통수단은 오금동. 천호동, 광진교를 거처 을지로6가에 가는 버스뿐이었다.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뜸 하였고 출퇴근인구가 많아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교통지옥이었다. 학생들은 버스 창문으로 탈 정도로 복잡하였다. 차장이 “올라 잇” 신호가 나면 운전기사는 어김없이 갈지자로 울렁이를 해야 조금 서서 지탱할 수가 있었다. 당시 열악한 생활환경과 교통 환경 속에서 성남이 제2의 고향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광주대단지(성남) 개발초기 이주민 단지
세월이 약이라더니 잠실대교와 세곡동 큰길이 개통되고, 버스 노선도 세곡동을 거처 을지로6가로 가는 66번과 잠실을 거쳐서 가는 270번, 영등포로 가는 36번이 1974년 후반에 생기면서 교통은 차츰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의 콩나물시루는 면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인구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광화문 정부청사로 출근하기란 새벽 7시 이전에 출발하여 2시간이상 소요되었고 한두 번을 환승해야 했었다. 마침 1977년 당시 공무원 출근용 통근버스가 서울시내에 배차되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각 부처에 총무과에 협조를 받아 성남에 살고 있는 공무원현황을 파악한 결과 50명 이상이었다. 그 명단으로 총무처와 협의를 거처 서울시경계인 세곡동에서 7시 20분에 출발하는 통근버스 한 대를 배차 받았다. 그러나 성남시내에서 승차 한 공무원들이 짐짝 같은 만원버스에서 세곡동에서 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니 성남에서 버스를 타고 세곡동에 통근버스로 환승할 수가 없어 승차 인원이 10여명도 안되어 한 달도 넘기지 못하고 노선이 폐쇄될 것임을 통보해 왔었다. 노선이 폐쇄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물론 성남시내까지 연장운행을 추진하고 있는 터에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운전기사와 안내양에게 총무처와 여행사가 허락을 하면 성남시내까지 연장운행을 해 줄 수 있는지를 타진하였다. 대신 연장운행에 소요되는 시간단축을 위하여 매일 두 사람의 택시비 기본요금을 보전해 준다는 조건으로 즉석에서 동의를 하였다. 다음은 차주인 고려여행사 사장을 만나 성남에 사는 공무원들의 출근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성남시 단대오거리까지 연장배차를 간곡히 요청한 결과 흔쾌히 승낙하였다. 총무처도 회사와 기사가 승낙한 일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는 각 부처 성남에서 출퇴근하는 공무원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통근버스가 단대오거리에서 출발하니 집근처 승차지점에서 이용하기를 권유하였다.
당시 출근버스 타기란 교통지옥이었다 성호시장 주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나 스스로 독단적으로 추진한 것이니 연장운행에 따른 기사와 안내양의 매월 지불해야 할 택시비 지원금 3만원 조달이 문제였다. 당시 내 봉급이 약 3만 원 정도였으니 월말이면 봉급전액을 기사와 안내양의 택시비 지원금으로 지불 할 판이었다. 당시 버스 기본요금이 100원이었고 택시는 600원이었다. 기사와 안내양의 지원금 충당을 위하여 승차하는 공무원들에게 매월 편도버스비 20일분 2000원을 각출하였다. 그리고 1977년 말에 공무원들의 친목봉사단체인 ‘재성남중앙공무원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통근버스운행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오래지 않아 승차 공무원이 150여명으로 늘어나 통근버스도 4대로 증차하게 되었다.
통근차가 성남시내까지 연장 운행되자, 농수산부에 다니는 최 모 양은 감격에 겨워 울먹이면서 “회장님 감사합니다.”를 전화로 연발하였다. 그리고 많은 부모님들로부터 감사의 전화를 받고 보니 그간에 애쓴 보람이 있었다. 특히 여자공무원들은 만원버스에서 어쩔 수 없는 성추행과 말 못할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통지옥에서 해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관광버스로 출근하는 공무원들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부러움이 말 할 수 없는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다. 꿈같이 안락한 통근 길에 다정한 친구들과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과 여유로움이 더해갔다. 공무원회는 회원들이 증가함에 따라 나날이 번창하였고, 기사지원비를 지불하고 남는 돈은 기금으로 쌓여갔다. 이를 이용한 성남시를 위한 봉사활동비, 자녀학자금 지원, 봄가을 문화유적지 답사, 전 가족체육대회, 불우이웃돕기 등 공무원들과 가족들의 자긍심과 보람이 높아지면서, 열정에 넘치는 젊음으로 살기 좋은 성남을 이룩하는데 온 정열을 쏟았었다.
회원들은 자긍심에서 오는 강한 자발적인 응집력과 분출하는 젊은 에너지는 매일 같이 힘든 퇴근 후에도 우리 집에 모여 밤낮이 없을 정도로 힘을 모았고, 공휴일에는 성남시 발전과 시민을 위한 봉사활동, 공무원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내 생애에 가장 보람 있는 시절을 보냈으며, 과천으로 이사 하고도 성남에서 보람 있는 활동을 못 잊어 다시 돌아와 40여년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제2의 고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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