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솜씨/수 필

성남에 살어리랐다 (2)

철산. 케네디 2014. 10. 19. 16:06

  

                            성남에 살어리랐다 (2)

                                                       -젊음의 열정. 밤낮 없는 봉사-

 

성남시로 승격은 되었으나 빈민들이 이주하였고, 광주대단지사건으로 주변 친구들이 성남에 산다면, 생활환경이 열악하고 무질서한 곳이라는 賤視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회원들은 통근차 운행을 계기로 성남을 살기 좋은 제2의 고향으로 만들겠다는 오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공무원회가 활성화 되면서 자연스러운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우선 성남시에 도울 수 있는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전 회원들의 동참 하에 매월 2~4회 이상 공휴일에 새마을운동과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시청 및 관변단체의 잦은 행사 때마다 홍보문화영화 필름을 지원하였다.

정식으로 필름을 지원받으려면 시청과 경기도를 거처 문공부의 승인을 받는데 10여일 걸렸다. 문공부 국립영화제작소에 근무하는 우리회원에게 전화 한통화로 당일에 지원되는 신속한 체제가 유지되었었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대한뉴스를 제작 배포하는 시절이었다. 정부행사, 통일주체국민회의 등 전국적인 행사에 성남시 관계자 들이 뉴스에 클로즈업 되는 것은 당연시 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성남시장이 바뀌면 전 회원을 초청하여 식사를 같이 하며 계속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었다. 그러나 우리 회는 중앙부처공무원의 자존심과 청렴성을 강조하며 시청이나 주변단체에서 찬조금을 받는 것을 엄격히 금기시하였다. 회원들의 자긍심이 높아졌고 자연히 이를 아는 중앙부처 공무원들도 부러워하였다. 그로인해 서울에서 성남으로 이사 오는 공무원도 늘어나고 있었다. 1985년 성남시에 대한 감사원 감사 시에 우리 공무원회 활동을 인지하고, 내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훈장수여를 추천하라는 권고를 받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었다. 성남시중앙공무원회를 모델로 안양과 의정부에 유사단체를 조직할 정도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철이 지나는 그곳은 뼈아픈 통근의 고통도, 난민촌이라는 자존심 상하는 눈총도 없었고, 개성이 강한 공무원들이 친목봉사단체의 필요성과 간절함이 없었으니 성공 할 수가 없었다. 특히 누가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앞장서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성호시장 4거리 거리정화청소 (1979년)

 

회원이 늘어나면서 기금도 쌓여 모든 회원의 자녀들의 중. 고등학교 입학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하였다. 부모도 없이 고학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는 체신부 임시직 정 모양은 3년간 학비전액을 장학금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봉인 공부원이 장거리 여행을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 공무원회의 주관으로 매년 봄. 가을로 전 가족을 동반하여 독립기념관, 현충사, 속리산, 설악산 여행과 때로는 12일 여행으로 경주 불국사, 지리산과 여수 등 전국 유명한 유적지를 거의 다 답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부인들과 가족들이 공무원회를 더 좋아했었고, 가족 간의 친목이 더 활성화 되었다. 그런 유대관계로 내가 40대 초반부터 미혼회원과 자녀들의 주례를 서기 시작하여, 아들 딸 모든 자녀의 주례를 하였거나 형제까지도 주례를 매년 10여건씩 보게 되었었다.

회원들이 봉사활동에 너무나 자발적이고 때로는 밤을 새우는 열정적인 행사준비활동으로 자연적으로 직장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회원들의 자존감과 긍지가 높아짐에 따라 지역사회와 성남시를 위한 봉사를 더 열심히 하였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16미리 영사기로 낮이 긴 여름에는 각 급 학교와 기업체 등 반공문화영화를 상영해 주었고, 1978년 반공회관에서 성남시 최초, 문공부 지원을 받아 국가발전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다음 해에는 지금 태평동 당시 성남시 청사지하에서 성남시 최초로 수재의연금 모금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농촌이었던 서현동, 수내동, 판교동 등으로 농사철에는 수없는 농촌일손 돕기 행사로 모심기와 벼 베기를 지원하였다. 당시 땀 흘린 후 막걸리 마시든 생각과 짬을 내어 정자동 물막이 탄천보()에서 여름철 물 장난치며 놀든 생각을 하면, 지금은 아파트가 산전벽해를 이루고 있어 천지가 개벽을 한 분당이라는 새로운 도시로 변했다.

성남문화원설립 시에 우리회가 보유한 16미리 영사기를 대여하였고, 국립도서관의 잉여도서와 회원들 기증도서 등 4500권을 기증하였었다. 문화원설립인가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문화공보부 문화과장과 관계기관에 우리회가 발행한 회보에 게재된 문화원에 지원 사실을 확인시키고, 당시 문화의 불모지며 열악한 환경에 문화원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과 예술인총연합회성남시 지부설립에도 기여하였던 추억이 기억 저편에 아물거리기도 한다.

 

    

 

 

지금은 천당 다음 분당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성남으로 발전하였다. 지금은 4개 전철노선(곧 여주노선 개통), 전국을 잇는 사통팔달로 연결된 버스노선, 전국 최고수준의 재정자립 도를 자랑하는 살기 좋은 도시가 되었다. 40 여년 성남생활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심어 놓고, 뿌리고 거둔 사연도 너무 많아 앞으로도 의지하고 살아갈 고향이 되었다.

 

태어나고 자란 어머님 품 같은 마음의 안태고향이 있어 좋고, 수많은 사연을 뿌리고 가꾼 천당 같은 제2고향 성남이 있어 더더욱 즐겁고 행복하다

 

                               

 

                                           

                                                      재성남중앙공무원회 30주년 기념동영상

                                   

 

 

'나의 솜씨 > 수 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남에 살어리랏다 (3)  (0) 2014.10.26
행복은 마음속에 피는 꽃이다   (0) 2014.10.21
성남에 살어리랏다 (1)  (0) 2014.10.19
아버지는 농부요 마부였다  (0) 2014.08.02
아름다운 능소화  (0) 2014.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