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에 살어리랐다 (4)
-형제보다 더한 우정-
사람이 살면서 피를 나눈 부모 자식과 형제간의 우애는 인륜이고 천륜이다.
그러나 부모 형제간에도 돈과 재산에 얽히면 천륜과 인륜이 무색할 정도로 소송을 하고 인연을 끊고 사는 경우도 많다. 가끔 매스컴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재산문제로 가족 간에 부끄러운 사건을 볼 때마다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러나 생사를 예상 못하는 전쟁터의 전우애, 어떤 목적이나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땀으로 얽힌 우정, 그 정을 쌓은 과정이 어렵고 힘들수록 그 만큼 우정은 깊어간다. 우리 재성남중앙공무원회도 성남시 초기 살 곳이 못 된다는 주위의 賤視와 척박한 환경에 뿌리를 두고 밤낮으로 땀 흘리며 살기 좋은 성남을 이루기 위한 봉사로 얽힌 각별한 인연이라 우정이 깊을 수밖에 없다.
문화공보부 사진과에 근무하신 원로 사진작가이신 고 윤복호 형님은 나보다 네 살이나 연상이면서 말을 낮춘 적이 없는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 공부원회 그 많은 행사와 회원 및 가족들 결혼식 사진을 찍어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예술인이었다. 1978년 우리 회 초창기에 문공부 지원을 받아 성남시 최초로 국가발전 사진전을 개최한 주역이었고 우리 회 발전에 특별한 공로자이었다.
가끔 지방에 사진공모전 심사라도 갔다 오면 심사비를 본인은 못 마시는 술을 회원들에게 사는 호인이었다. 칠순, 팔순잔치 그리고 무지개 사진전, 개인 및 단체 사진전 몇 번의 입원에 우리회도 성의를 다했었다. 80평생을 사진작가로 사시며 수많은 친구모임 중에 우리 회를 가장 사랑하신 분이였고 모두가 큰형님으로 모셨다.
또한 국립영화제작소에 근무하였던 우 세환 씨가 없었으면 공무원회가 존속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모든 열정을 우리 회를 위하여 다 쏟은 분이었다. 자기일 자기 집의 살림보다 회원들의 생일까지 기억하고 챙기는 분이다. 20여 년 전 가족이 친구의 빚보증에 고리대금업자에게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회원들이 합심하여 신용카드 론을 활용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도와 주기도하였다.
1985년 당시 동력자원부에 근무하는 문한용 씨가 우리 회 최초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그분은 사연도 많고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당시 유행하는 회갑연 겸 퇴임축하연을 우리회가 전액 부담으로 차려 주기도 했었다.
또한 우리회원 중에 노총각, 노처녀인 회원 간 결혼을 하는 안 모 씨 부부는 우리회가 주관하여 성남시 개청 후 최초로 시청대회의실에서 결혼식을 거행했었다. 결혼식 주례와 사회는 물론, 휴일임에도 식당요원을 동원하여 피로연을 구내식당에서 치렀다.
80년도 초창기에 당뇨로 쓰러진 문화공보부 고 정갑봉 씨가 국립의료원에 입원하자 통근차를 대기시키고 전 회원이 병문안을 하였는가 하면, 네 명이나 되는 국립의료원 회원들의 각별한 도움을 받았다. 그분은 은혜를 갑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며 몇 번의 생사고비를 넘기면서 굳은 의지로 20년 이상을 더 사시면서 "공무원회가 있어 행복했다"는 우정의 말을 남기고 가셨다.
특히 회원가족들이 우리 회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박봉에 그 어려운 시절에도 매년 봄. 가을마다 전 가족동반 전국의 유명유적지 탐방 아니면 체육대회를 실시함으로 가족 간의 친목이 더 각별하였다. 장거리 여행에 돌아 올 때는 관광버스 바닥이 무너질 정도로 뛰고 노는 것을 볼 때마다, 가난에 찌든 부인들의 스트레스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봄가을 만 되면 가족들이 올해는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 관심사가 되었다. 회원 간에 집안에 대소경조사까지 우리회가 적극적인 후원과 자녀 중고등학교 입학 장학금, 불우회원에게는 정성어린 도움으로 회원 간의 우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잊을 수 없는 것은 통근차를 성남시내 연장운행으로 기사와 안내양에 대한 고마움도 크지만, 회사는 연료비등을 고려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였다. 여행사 사장에게는 품위 있는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추석과 명절에는 기사와 안내양 사무원까지 작은 선물이지만 해마다 보냈었다. 그리고 연말 크리스마스 전후에는 그 회사의 모든 기사와 안내양과 우리 임원들이 어울려 연말파티를 열어주었다. 우리 회는 열악한 관광버스기사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하였으며 더불어 산다는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한 우정이 여행 성수기에도 성남의 통근차는 한 번도 결행하는 일이 없었다. 때로는 장거리 숙박 코스에 갔다가도 밤새워 올라 와서 새벽에 통근을 시키고 다시 돌아가는 이 규석 기사님의 열성과 고마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젊었을 때 많은 열정을 쏟았던 봉사와 온 가족전체가 전국 유명유적지 여행, 전 가족체육대회 등 가족 간의 친화, 수시로 소주잔을 기우린 우정으로 보낸 추억이 그리워 나 역시 과천으로 이사 갔다 다시 성남으로 돌아왔었다. 서울로 이사를 갔다 다시 온 친구도 체신부 강 병수, 경제기획원 고 강 대한, 공진청 김 영근 씨 등이 있는가 하면 제주도로 이사 갔다 다시 온 윤 영설 씨도 있다. 이사는 갔지만 지금도 그 정을 못 잊어 수시로 연락하는 내무부에 근무하였던 안 성준 씨. 유 승한 씨. 대전으로 이사 간 신 양재 씨 등 가끔 만나기도 한다. 아름다운 추억의 그리움이 각별하여 친형제이상으로 우정을 나누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신이 아니고 성자(聖者)가 아닌 이상 이기적(利己的)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본주의사회가 발전하는 핵심인 경쟁은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감성이 풍부한 인간은 서로가 신뢰를 바탕으로 진심으로 대하면 이해타산을 넘어 봉사와 희생으로 은혜로 뒤돌아 옴을 많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성남을 사랑하고 불우 이웃을 돌보며 형제 같이 서로를 위하고 도와준 우리 회원들이 있어 내 인생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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