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솜씨/수 필

성남에 살어리랏다 (3)

철산. 케네디 2014. 10. 26. 12:03

                                

                                  성남에 살어리랐다 (3)

                                                            -직급을 따지면 회원이 아니다-

 

우리는 똑 같은 회원이므로 누구든 직급과 직명을 부르면 회원이 아니다

내가 재성남중앙공무원회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이 말이 첫 인사였다.

 

공무원은 업무자체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자로 직무와 관련된 사람 외에는 친절할 필요가 없다. 업무와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있어 금기시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 회사원은 고객 또는 소비자들의 호감을 유발하기 위하여 거액을 투자하는 광고와 영업활동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명함을 뿌리고 많은 사람을 사귀는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공무원은 특별한 경우 이외는 명함이 없었으며, 특수기관을 명시한 명함은 금지할 정도로 폐쇄성이 강하다. 직무이외 같은 부서 직원 간에도 서로의 업무에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또한 국민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한 업무수행과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상하 간에 위계질서가 엄격하므로 직급의 호칭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친목봉사단체인 재성남중앙공무원회는 통근버스를 따면서 조직된 비공식 모임이므로 직급이나 계급을 따지는 것은 친목을 해치는 것이므로 엄금하였다. 공무원의 직급은 법으로 정해져있고 정부기관 공통된 계급이며 상하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징표성이 강한 편이다. 출근을 위해 같은 차를 타면서 여러 부처 공무원의 모인 친목봉사모임에 태생적으로 직급의 차이가 친목의 걸림돌이 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직급과 신분이 노출되면 친목모임이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아 의도적으로 은폐하기로 하였다. 나는 이미 직급이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회장인 나에 대한 직급호칭을 엄금하였고, 창립총회 때 이를 분명히 밝히고 회원명단에 이름과 집 주소, 연락전화만 기록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임원도 하위직으로 임명하였다. 성남에서 출근하는 회원은 거의가 하위직이었고 생활이 어려웠다. 직장에서 직급으로 받는 스트레스에 기를 못 펴는데 사적인 친목회에서는 책임 있는 역할을 맡아 기를 펴고 활동하도록 배려하였다.

 

공무원회의 본부조직은 회장, 부회장, 감사, 총무부, 조직부, 섭외홍보부, 사업부, 문화부, 여성부를 두었고 부서장을 능력위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앙청지부, 종합청사지부, 기획원지부, 체신부지부, 중부(국립의료원. 동자부)지부, 남부(공진청, 영등포)지부의 지부장은 가능한 하위직을 임명하여 자존감을 높여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하여 조직을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였다. 당시 공무원통근버스는 공무원증 외에 통근버스를 탈 수 있는 패스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총무처 직원 아니면 위임 받은 공무원이 패스를 조사하였다. 그 조사도 우리 회에 위임되어 있었고 수시로 실시하는 봉사활동에 참석을 못하면 다음날 통근버스를 승차할 때 스스로 미안해 할 정도로 조직에 귀속감과 자기의 소임을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각 지부장은 봉사활동에 소속지부 회원의 동원과 매년 실시하는 가족동반 유적지 탐방과 체육대회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가족들에게 긍지를 느끼게 배려하였다. 더구나 내 부인이 성남초등학교 근무할 당시에 지부대항 체육대회 때는 학교밴드까지 출연을 함으로 학교운동회 버금가는 큰 행사를 할 때도 있었다. 지부장은 체육대회와 지방 유적지 탐방 시에 인원동원, 소속지부 가족인솔, 안전관리, 식음료 배분, 경연대회 인원차출 등 역할과 책임이 막중하였다. 그러므로 다수의 상급자를 오히려 통솔하게 함으로 가족들에게 가장의 존재감과 보람을 느끼게 하여 공무원회를 더 활성화 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이 태평동 지금 이마트가 있는 구 시청과 등기소 뒤에 새마을주택이었다. 먼 퇴근길 피로도 잊고 거의 매일 임원들이 모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면서 젊음을 열정으로 불태운 시절,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이 보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즐거운 시절이었다.

당시 부회장이었든 문공부 고 유복호 형님, 홍보부장이었든 우세환씨, 조직부장 내무부 안성준씨. 문화부장 경제기획원 고 강대한씨. 사업부장 강병수씨, 부녀부장 지순영씨 등 너무나 열정적이었고 희생적이었다. 그 후에 이사 온 이한원씨, 유봉근씨, 유천근씨, 윤영설씨, 이용수씨, 조성균씨 등 많은 회원들이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 당시 성남초등하교 교사였던 부인은 매일 저녁 식사, 맥주시중에 금전적인 지출과 수고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불평 없이 뒤치다꺼리를 해 준 것에 대해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미안할 뿐이디.

80년대 중반 이후 공무원 통근버스가 성남시내 배차가 공식화 되면서 회비를 징수할 명목이 없어지면서 공무원회 활동도 점차 위축되어 갔다. 신도시 분당이 생기면서 우리회가 성남시에 기여하는 비중도 약해졌다. 고령인 회원이 한두 사람씩 고인이 되고 있어 안타갑기도 하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공직에서 퇴직하였으나 변함없이 호형호제하면서 초창기 열정적인 회원 간에는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친 형제보다 더 소중하고 다정하게 정기적으로 20여명 만나 아직도 즐겁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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