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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식 답사-
1962년 3월 군에서 제대를 하고 시골에 농사를 돕고 있었다. 그 해 가을 동아일보에 9급 공무원시험 공고를 보고 응시했었다. 경남지역 시험장인 부산의 토성초등학교의 응시자만 5000명이 넘어 보였다. 당시 보통고시, 고등고시 시험은 있었지만 9급(당시는 5급을) 공무원 채용시험은 처음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하급공무원은 연줄로 임시직으로 채용되었다 정식직원으로 채용하는 시절이라 배경이 없으면 공무원은 물론 괜찮은 직장은 구할 수가 없었다.
5.16 후 군사정부에서 공개채용을 처음 실시하였으니 응시생은 거의 고학력출신이 많았고, 서울대학 등 일류대학 출신도 흔했다. 응시자 수로 보아도 합격은 상상도 할 수 없겠다 싶어 시험도 전에 기가 죽었다.
요행이 합격이 되어 법학과 출신이라 제1 지망부처를 법무부로 지원했다. ‘63년 2월초에 교도관학교에 3월 1일에 입교하라는 법무부 장관의 통지서를 받고 입교를 했다. 교도관학교가 무엇을 교육하는 지도 모르고 입교를 하였다. 교육생이 250명 8개 소대나 되는 교도관 양성교육이었다. 처음에는 교육자체도 군대 같았고, 죄인을 다루는 교도관이라 실망을 했지만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는 절박함에 50일 간의 교육을 열심히 받았다.
졸업식 5일전에 교무실에서 부르기에 갔더니, 졸업성적이 1등이니 졸업식 날 법무부 차관의 축사할 예정인데, 그에 대한 답사를 해야 하니 초안을 써오라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시 박 모 교무과장의 후배 이 모 씨가 수석으로 졸업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교무과장의 후배 사랑이 두드러진데다 수석 졸업자는 본인이 원하는 교도소에 배치되는 특혜가 주어졌다. 배경이 크게 작용하는 시절이라 이 모 씨가 수석을 할 것으로 졸업생 대부분이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취업의 어려움으로 교유생 중에는 서울의 일류대학 출신도 많았는데 의외로 내가 수석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1등한데 대한 교무과장의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나타냈다. 답사초안을 세 번, 네 번을 고쳐 가도 내용은 보는 둥 마는 둥 무조건 다시 쓰서 오란다. 그 수모와 심술은 1등을 반납할 수만 있다면 그만 두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다. 겨우 졸업 전날, 시간에 쫓기어 어쩔 수 없이 겨우 내용을 확정해 주었다.
당시 나는 행정고시와 사법고시를 목표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교도관학교 50일간의 武道, 포승술(捕縄術) 등 다양한 교육에 1등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덕분에 단 한명이 배치되는 서울구치소에 4월 하순에 배치를 받았다. 배치된 새내기 교도관은 영락없이 구치소 주변을 둘러쳐진 높은 담장을 따라 중간 중간에 세워진 고망대(高望臺)에 올라가 탈주범을 살피는 보초를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했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11월 중순까지는 고망대에서, 요령 것 책도 보고 2시간마다 교대를 하고 쉬는 등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겨울에는 6~7미터 높이의 고망대 창문 틈 사이 칼바람은 기능이 약한 전기난로 하나로는 견디기가 힘들었고 고통이 심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근무환경이었다. 그렇다고 가정형편과 여러 가지 사정상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오직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를 탈피하는 방법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1963년 말 행정고등고시 1차에 합격을 하였고 2차 시험은 추운 겨울 중앙대학교에서 치렀다. 당시는 20여명 정도를 뽑던 시절이었고, 직장을 가진 나로서는 공부만 전념할 수 없었고 경제학에 실력이 역부족이었다. 고등고시 1차 합격으로 고망대를 면하게 해주었다. 서무과로 발령을 받고 500여명의 직원봉급을 담당하는 경리를 보게 되었다. 고망대 근무 6개월 후 비로소 아침에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 하는 사무직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직장 친구를 알게 되고 퇴근 때 술도 마시면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후 ‘64년에 사법고시도 1차는 합격하였으나 점차 나는 정신적으로 나태해져 그 높은 고시의 벽은 넘을 수가 없었다.
제2차시험고사장
더구나 6형제의 장남인 나는 부모님의 성화에 1965년에 결혼을 하였고 적은 봉급에 가정을 가지고 형제들을 생각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 법무부 교정국으로 전출하게 되었다. 덕수궁 옆 법무부와 대검찰청, 대법원 등이 몰려있던 그곳에서 2년간을 근무한 후 1968년 과학기술처가 새로 신설되면서 법무부생활을 마감하고 과학기술처로 옮겼다. 법무부 근무할 당시 나를 아끼던 오완탁 씨가 과학기술처 예산담당관으로 전출하면서 나를 산하 국립지질조사소 예산담당으로 가면서 과학기술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법무부 근무당시 각 부처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기획원에 각별한 노력을 할 때에도 법무부는 예외였다. 과장 국장을 검사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예산 확보를 위하여 소요경비를 모으자고 권하면, 단호히 부정한 방법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대세였다. 그러니 사무실에 오시는 손님의 차를 접대하는 경비도 과장이 봉급에서 부담하거나 직원들의 시내 출장비를 절약하여 사용하는 청렴의 표본부처였다.
국립지질조사소로 전출 후에는 지질조사전문요원들이 야외출장비와 지질 시료채취비(地質 試料採取費)를 절약하여 출장 후 사무실 운영비를 지원함으로 손님접대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특히 당시는 통행금지(1988년1월1일 이전)가 있는 시절임에도 젊은 혈기에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법무부에 근무한다는 핑계로 통금에 구애 없이 다니며 오만하게 권력의 맛을 살 작 본 기억도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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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에 탈락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1968년 과학기술처 신설뿐만 아니라 홍능에 과학기술연구단지를 조성하고 과학기술원을 설립하여 외국의 유명한 교포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고 과학입국을 부르짖었다.
나는 과학기술처가 발족하면서 법무부에서 과학기술처 산하 국립지질조사소로 전출되었다. 상공부산하에 있던 국립지질조사소가 새로 발족하는 과학기술처 산하로 소속부처가 변경되었다. 법무부에서 전국교도소 예산을 다루는 연고로 같이 근무하였던 오완택 사무관이 과학기술부예산담당관으로 가면서 나도 같이 산하국립지질조사소 예산담당으로 전출하게 되었다. 당시 국립지짌조사소는 삼각지 인근 남영동에 있었다. 당시 국립지질조사소 예산이 과학기술처 본부보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대통령이 지하자원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과학기술부산하로 국립지질조사소를 이관하면서 조사소에 근무하다 군에 간 지질조사요원까지 군에서 파견 받는 특단의 조치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와대 상황판에 지질조사 진행을 기록함으로써 지질조사 심사분석보고업무도 내차지가 되였다.
지질조사업무도 도폭조사(기본지형조사), 지하자원분포. 매장량조사, 지질분석, 등 사업내용도 다양하였다. 정부의 예산편성지침이 내려오는 4월부터 예산편성업무, 과학기술처에 제출과 심사, 경제기획원에 예산심의 조정, 국회예산 통과되는 연말까지 정신없이 내부업무와 대외업무처리로, 때로는 밤을 새우는 일도 예사였다.
그리고 국회 상임위원회 예산심의 때는 나는 답변할 위치(국장급이상 답변이 상례)가 아니므로 국장이 없는 지질조사소는 불가피 소장님과 답변 자료를 제공하는 나와 단 둘이 다녔다. 기술직 1급인 소장은 내 직급도 알지 못했고 나도 구태어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담당과장인 김 모 서무과장과 장 모 계장은 내용도 잘 모르지만 예산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었다. 예산을 확보해 놓으면 사용할 때 이권이나 챙기는 부류였다.
1972년 나는 주사보(7급)이었고, 주사(6급)자리가 한자리 비어 진급을 누가 하느냐가 150여명의 직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나와 김 모씨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 진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직원들은 객관적으로는 누가 보아도 예산업무를 하면서 과기처와 기획원, 국회를 다니면서 고생하는 내가 진급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김 모씨가 진급을 하였고, 소문은 당시 아주 부유한 가정에나 있는 냉장고 한 대를 서무과장 집에 사주고 진급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몇 년을 예산확보를 위하여 국회를 함께 다닌 기술직 소장님은 나의 직급을 알고 있을 리 없었고, 나 또한 나의 진급에 대하여 단 한마디 소장님께 말도 한바 없었다. 그러니 소장님은 대외적인 업무처리 능력으로 볼 때 나를 보다 높은 직급으로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틈을 타 간교한 서무과장의 농단에 소장님도 나도 넘어간 것이 분명했었다. 그러니 나는 서무과장의 배신과 소장님에 대한 원망 등으로 지질조사소에 대한 뿌리 깊게 정나미가 딱 틀어진 상태로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마침, 1973년 1월 지질조사소가 과학기술처 산하에서 다시 상공부 산하에 새로 발족하는 공업진흥청 산하로 이관 되는 정부조직법이 바귀었다. 공업진흥청이 발족하면서 예산을 담당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당시 초대 공업진흥청장 예정자는 강릉 출신의 서울시 부시장을 하신 최종완 박사 청장님과 비서관을 잘 아는 우리 조사소 최 모직원이 나의 심정과 입장을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공업진흥청 예산담당으로 추천하여 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담당하기 싫어하고, 일 년 내내 고생만 하는 예산업무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소장님은 잘 알 고 있었다. 내가 새로 발족하는 공업진흥청으로 전출명단에 포함시켜 놓으면 소장님이 본부에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조사소 잔류명단(소속 부처가 바귀면 전 직원 재발령 함)에 포함시키고 하는 번복을 두 세 번했었다. 결국 공업진흥청의 주사(6급) 정원 한자리를 양보 받아 나를 진급시켜 조사소에서 근무하기로 함의를 보는 쇼를 벌였다. 대신 내가 노력해 법무부에서 전출 받아 예산업무를 교육시키는 장 영업 씨를 공업진흥청 예산담당으로 보내는 조건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지질조사소에서 마음은 떠나 있었고 공업진흥청으로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심적 타격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경제기힉원 상공예산담당관 정충섭 씨의 소개로 공업단지관리청 예산담당으로 전출을 권유받았다.
1974년 신정에 여자에게 약한 남자들의 심정을 이용할 목적으로 부인과 같이 ...동에 사는 지질조사소장 댁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공업단지관리청으로 전출을 승인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간곡한 부탁에 승낙을 받았다. 그간의 고생 많은 예산업무와 시도 때도 없는 청와대 지질조사의 진행상황을 보고하는 업무에 수고가 많았다는 위로의 말을 들었다,
1968년에 시작된 지질조사소 근무는 남영동 시대를 거쳐 1970년구로동 공업단지 시대, 또한 소속부처도 상공부에서 과학기술처로, 다시 상공부 산하 공업진흥청 소속으로 근무하는 복잡한 과정은 1974년 4월 공업단지로 전출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는 1972년 3월 부인이 파주 금촌초등학교에서 성남시 제일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음으로 나도 성남시, 당시는 광주대단지로 이사하는 등 젊은 시절이기에 심한 파도를 넘는 시련의 시절을 보내며 담금질이 되었던 추억의 한 토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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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싸시오-
김 종길
“왜 절대 안 된다는 거요. 그럼 보따리 싸시오”
화가 난 위원장 말에 새로 부임한 국장급이상 10여명은 극도의 긴장감에 순간 회의실은 찬바람이 휘몰아 쳤다. 위원장은 문을 열고 나가다 되돌아 와 부위원장에게 “늦었으니 식사나 하시오”하고 두둑이 식비를 주면서 퇴청을 하였다. 당시 중앙청 동편 지하벙커 깊은 곳에 있던 회의실은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부위원장은 “김 과장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너무 부정적이고 단정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에 화가 나신 것 같소. 회의는 이정도로 하고 한일관에 가서 식사나 하고 갑시다.” 회의는 끝이 났다. 회의를 계속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일관에서 저녁 겸 술판이 벌어졌다. 거기에는 신임 예비역 10여명이 있었고, 일반직공무원은 국장 한명과 과장인 나뿐이었다. 그 자리에 군 출신 중에 나를 아는 분은 부위원장뿐이었다. 새로 부임한 예비역들은 장관급인 위원장이 과장에게 “보따리를 싸시오” 했으니, 군의 정서라면 신변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술잔이 송별주인양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술이 싫지 않는 40대시절이라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는 별로 당황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는 나를 보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위원장이 식비를 내 놓은 이유를 알 것 같아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1979년 3월 상공부에 근무하다 예비역 고위급별정직이 대다수인 국가안전보장회의로 직장을 옮겼다. 그 후 10.26사태와 12.12, 5.18을 거처 ‘80년 9월 ‘서슬이 퍼런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81년 초에 군 출신 별정직 공무원은 모두 교체되는 칼바람이 불었다. 다행히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1계급을 승진하여 재임명됨으로써 나를 아는 분은 그분들뿐이었다. 그 외 군 출신은 내가 얼굴조차 잘 모를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도 상공부담당과장인 내가 위원장을 비롯하여 새로 임명된 고위직 예비역간부를 대상으로, 전시(戰時)가 되면 상공부소관 군수물자를 어떻게 동원하느냐, 하는 업무내용을 브리핑 하는 자리였다. 전시초기에 군수물자 수요는 폭증한다. 상공부소관 동원 군수품은 민수품과 판이하게 다르다. 전시에 폭증하는 군수물자 생산을 위하여 민수품 생산업체를 군수업체로 전환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군복생산에 필요한 단추생산업체까지 동원할 것인가? 군용자동차에 소요되는 볼트, 너트 등 영세업체를 동원하는 것도 문제가 많았다. 그 날 내 설명을 듣는 간부들은 군에서 전역하고 곧장 부임한 분들이라 내용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군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황별, 무기별, 분대별로 완벽한 작전계획과 같이, 물자동원도 영세업체까지 동원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위원장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후배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군수 자동차생산업체와 볼트, 너트 업체를 왜 연계동원하지 않는가?”하고 질문을 하였다.
“평시에도 영세업체는 폐업과 이전이 잦아 동원계획에 반영하기에 문제가 있고, 특히 전시에 대 혼란을 가정한다면 사전계획에 포함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습니다.”
“군의 작전계획과 같이 차량생산에 소요되는 모든 부품업체를 수직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완벽한 계획이 아닌가?”
나는 “그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계획이며, 실행가능성도 없습니다.”
아차!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군대 출신들 앞에서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는 순간 불호령이 떨어 진 것이다. 내가 “노력하겠습니다. 연구하겠습니다.”라는 순응하는 말이 아니라 “절대로 불가능 하다”는 단정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에 화가 난 것이다.
위원장은 내가 국가안전보장회의로 전출 후 부위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다른 부처의 동원물자는 군수와 민수제품이 거의 동일하므로, 전시에 군수품동원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군수와 민수가 다른 상공분야는 문제가 많음을 알고 있었다.
부위원장은 시간만 있으면 상공담당인 나를 불러 “왜 군의 작전계획처럼 체계적으로 모든 부품업체를 계열화하여 동원하지 않는가? 큰 부품과 대형업체만 동원하는 계획에 문제가 있지 않는가?” 등 다정한 형제처럼 업무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파악하면서 많은 담소를 나누었었다. 나는 ”모든 업체가 국가소유인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는 제품업체의 수직적인 계열화가 가능하나, 시장경제체제인 우리는 전시를 대비한 평시계획에 영세업체를 동원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설사 동원계획에 반영할 수는 있으나, 영세업체는 수시로 이전. 폐업 등으로 인해 매번 계획을 변경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합니다“ “중요부품과 일정수준의 업체만 계획에 반영하고, 전시에 필요하면 그때 행정력을 집중하여 필요한 업체를 동원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는 자세한 설명에 충분히 이해를 하셨다. 복잡한 상공동원계획을 맡아 고생이 많다며 큰형님 같이 다정하게 격려까지 하시던 분이 위원장이 되신 것이다. 그날도 나의 설명내용이 잘못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신임 예비역 출신의 한참 후배들 앞에서, 과장인 내가 당돌하게 ”절대불가 하다“는 단정적인 말을 한 것이 슈퍼 갑인 자기체면에 말이 아니라는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말을 순화하지 못한 나도 문제지만,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나에게 “보따리 싸라”는 갑의 호통도 적절치 못 하였다. 그로인해 그날 회식분위기는 나를 위한 송별회 같았으나, 결과는 신임 간부들의 환영회를 한 샘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뽑은 국민의 대변인이 주권자인 대리운전기사에게 “내가 누구인 줄 모르느냐”는 행패와 폭행을 하는 特甲, 온갖 냄새와 먼지를 풍기면서 가시 돋친 회초리로 공직후보자를 죄인 취급하는 먼지 털이 特甲 들.
공무수행을 위하여 부여된 우월적 지위와 인격에 과분한 권한을 가진 자가, 자기의 고유의 특권인양 사용(私用)하는 병폐가 사회곳곳에 잠재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 전근대적인 수직적 사고를 버리고 수평적 사고를 하는 문화수준이 될까.
甲午年이 지났으니 甲은 자중하고 乙未年에는 乙이 氣를 펴고 사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나는 개성과 사투리, 습관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멋쩍은 실수를 할 때가 가끔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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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 명예퇴직 식-
1985년 신군부가 자리를 잡고 안정되자 12월 23일 국방대학원 졸업식에 모처럼 대통령이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학원장인 육군중장 C씨는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여 졸업식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그 졸업식 전전날 예행연습에 대통령이 수여하는 졸업장을 받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원장은 1.5미터가 높이의 단상에서 단하서 올라오는 졸업생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장인 군복과 와이셔츠에 어울리지 않는 색깔이 있는 순모조끼를 입은, 조모 중령을 발견한 것이다.
원장 옆에는 준장인 학생처장과 대령인 과장이 있었음에도 직접 중령의 넥타이를 잡아끌면서, 250여명의 졸업생이 보는 앞에서 지휘봉으로 배를 꾹꾹 찌르며 모욕적인 폭언을 퍼부었다. 졸업예정자는 각 군에서 고급장교는 물론 전국에서 선발된 경찰의 경무관, 일반직 서기관이상 고위공무원 들이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대학원장은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었고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신으로 각인되었다. 그 대학원장이 2년 후 전역을 하고 내가 근무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부위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분은 인격적으로 존경할 수 없는 선입견으로 대학원장으로 있을 당시 졸업했다는 사실을 밝히지도 않았고, 무관심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분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의 불이익은 각오했었다.
전시동원을 위하여 정부가 민수업체를 동원지정하고, 전시동원준비를 하게하며 또한 예비역을 비상계획부장으로 배치함에도 아무른 혜택이 없었다. 이러한 업체에 혜택을 주기위하여 ‘조세특례법개정초안’에 혜택을 주는 조항을 내가 만들어 담당부서로 보내어 법 개정을 추진하게 하였다. 그것이 당시 우리 기관의 숙원사업이었다. 담당 정모 사무관이 법 개정안을 정식 결제도 받지 않고, 동창인 재정경제부 담당 친구에게 우선 보낸 것이다. 그것이 ‘조세특례법개정안’이 포함되어 차관회의에 상정됨으로 부위원장이 출석하여 설명을 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부위원장이 결재한 일도 없는 소관 법안이 차관회의에 올라갔으니 난리가 났다. 특히 세법관계라 내용도 잘 모르는데, 차관회의에서 설명을 할 자신이 있을 리 없었다. 동원기획실장이 대신 참석하여 법안이 통과되어 장관 회의에 상정되었다. 당시 이상훈 위원장은 우리기관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며 좋아하였고, 기안한 나를 불러 칭찬까지 하였다. 그러나 부위원장은 내부결재도 없이 법안이 차관회의까지 반영된 경위에 대한 내부조사를 지시하였다. 나는 당초 법안의 발의자란 이유로 조사가 집중되었으나 실장까지 결재를 받았으므로 절차상 아무른 문제가 없었다. 총괄부서의 정모사무관도 절차상에 실수였으나, 숙원사업이 해결될 것임으로 결과적으로는 아주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부위원장은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이 내부조사까지 벌리는 소동에 대한 나의 불만은 참기가 힘이 들었다.
국방대학원 졸업식 때의 사건과 내부조사 사건으로 부위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더 깊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장인 나보다 나이가 적은 대령들이 전역을 하고 부장(2급 상당)으로 부임하는 예비역이 점차 많아졌다. 그 분들은 대부분 보병병과라 동원업무자체가 생소한데다, 이를 숙지하는데 약 2년은 소요되었다. 그 동안에 업무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젊은 상급자에게 업무내용을 이해를 시키는 과정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는 의외로 많았다.
계급의식이 강한 군 출신 상급자를 만나면 이를 이해시키기는 것이 그리 만만한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육군법무실장을 하였다는 J모 실장(장군출신)은 대통령 명령이 법률보다 앞선다는 주장에는 할 말이 없었다. 점점 직장에 대한 흥미와 보람을 잃기 시작하였다. 당시 도입되었던 명예퇴직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복합적인 요인과 명분을 쌓이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인격적으로 존경할 수 없는 부위원장이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1989년에는 명예퇴직의 명분이 하나가 더 쌓였다. 그리고 1990년 명예퇴직을 신청하였고 그해 5월말일자로 30년 공직 생활을 끝으로 퇴직을 하였다. 당시는 명예퇴직제도의 도입초기였고 지금처럼 의도적으로 퇴직시키는 시절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명예퇴직을 하고 한화그룹에 취업하여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30년을 성실히 근무한 고위직 공무원의 명예퇴직을 위원장실에서 실장급 4명 앞에서 간략하게 공로패수여로 치르는 수모를 참아야 했다. 보다 못한 후배들이 자발적으로 회의실에서 비공식 명예퇴직식을 하였고, 직원들 이름으로 공로패와 행운의 열쇠를 전달 받았다.
상급자로서 존경할 수 없었던 C 위원장과 나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로는 얼굴을 마주 칠 일이 없었다. 그 분이 위원장을 그 만둔 후로 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신임비상계획관 교육, 부처와 시도 담당자 교육에 5년간을 출강을 하였고, 선후배들의 만나기 위하여 자주 들리기도 하였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부하직원들 인격을 존중하는 관리자, 개인의 특권의식에서 오는 甲질이 없는 사회에 살고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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