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烈夫. 내 친구
김 종 길
“회장님 노후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는 예순이 지난 후 나를 만날 때 마다, 5년간 봉사모임에 회장을 한 나에게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말이다.
그 친구 부인은 평생지병에다 가정형편이 나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진심이었고 확신에 가까운 의지가 있었다. 그 친구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 그는 추석. 명절과 내 생일에는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주어 미안할 정도로 고마웠고 인간적이었다.
그는 다섯 살 아래이며 성남에서 공무원 통근버스를 타면서 알게 된 30년 친구다.
그 친구는 평생을 오직 부인에 대한 온갖 정성과 열렬한 사랑으로 살아 온 烈夫였다.
애석하게도 그와 부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80년대 초에 성남에서 서울로 통근하는 공무원들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생활에 힘들게 살고 있었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그 친구는 얼굴에 그늘과 웃음이 동시에 나타나는 묘한 인상이었다. 수시로 모여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모임의 회원들에게 친화력이 남달랐다. 당시 내가 어렵게 통근버스를 유치한 사연을 알고 있기에 유달리 고마워하고,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진심이 실려 있었다.
가끔 술이라도 한잔하는 날이면 형님 같다며 가정이야기를 내 앞에서 털어 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를 알면 알수록 애틋하고 애잔한 마음이 쌓여만 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젊은 시절에 동대문 인근에서 이발사로 근무했다. 옆집 미장원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단다. 아가씨,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려 방문한 날, 은행지점장인 아버지는 절대로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 이유를 묻자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몇 번을 방문한 결과, 자기 딸은 평생 고질병인 간질병 환자이기에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청천벽력 같았지만, 이미 불같은 열정으로 사랑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그 병을 고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 테니 결혼을 승낙해 달라”고 매일 같이 간청한 결과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키웠다. 남들 보기에는 평온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 친구의 막냇동생과 큰 아들의 주례까지 서기도 했다. 그러나 간질병은 현대 의학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병이다. 이를 고치기 위하여 전국의 유명한 병원과 한의사를 다 찾아 다녔단다. 더구나 나이가 먹을수록 더 발병 빈도가 잦고 심해가기만 했다. 말단 공무원의 박봉에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근 후에도 Two Job으로 포장마차, 야간업소 근무, 야간경비, 건물청소 안 해 본 것이 없단다. 후암동에 살 때는 새벽 4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에 생선 사다 놓고 출근하고, 퇴근 후에 남대문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했단다. 텃세 폭력배가 그냥 둘리 없었다. 집단폭력배와 목숨을 건 한판 싸움에서 회칼을 휘둘러 쌍방 폭행으로 경찰서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할 때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 약하고 순한 사람이 부인의 치료비 조달위해 처절한 삶의 절박함에 조직폭력배들과 목숨을 담보한 혈투를 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존경스럽기까지 했었다. 그 일로 경찰과 조직폭력배들도 그의 가정사정을 이해하고 포장마차터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후 성남으로 이사를 하고도 Two Job은 계속되었고 남대문 폭력배가 친히 성남까지 방문하여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 성남의 토착 깡패에게 형님으로 대접하라고 부탁까지 하고 갔다. 포장마차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어 부인의 병원비를 충당하는데 도움이 되었단다. 가끔 지방 또는 이름도 처음 듣는 시골의 유명한 의사와 한약방을 갔다 왔다면서 피곤한 기색을 나한테는 숨기지 않고 틀어 놓았다.
보다 못한 형제자매들도 이혼을 강권했으나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펄쩍 뛰곤 했단다. 평생을 부인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하였고, 불을 보면 발병하는 부인 대신 살림까지 하면서 살았다. 밖에 있을 때에도 수시로 식구들에게 전화해서 부인의 안부를 묻곤 했었다. 결국 부인은 나이가 많아지자 정신을 놓고 무의식적인 가출에 애를 태우더니, 모 대학 뒷산에서 객사를 한 것이 5년 전 일이었다. 평생을 부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 그 친구가 너무나 애절한 통곡소리에 자기 스스로 혼절하곤 했었다. 그 후 결혼 못한 막내아들마저 교통사고로 3년 전에 잃었다. 이래저래 폭풍처럼 밀려오는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아무리 만류를 해도 어쩔 수 없이 술에 찌들다 병을 얻었다.
2014년 추석에 예쁜 아줌마와 같이 우리 집에 왓서는 알콩달콩 잘 살겠다고 언약처럼 하고 갔었다. 평생을 부인을 위해 열부로 희생한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작고한 부인도 이해 할 것이라”며, 이제 정말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었다. 그러고 한 달 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내가 의지하고 있는 큰 나무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이 한동안 정신이 몽롱 했었다.
요즈음 부부가 온갖 비이성적이고 굴곡진 삶을 살면서도 행복을 누리고 잘 살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매스컴에서 위선과 탈선을 최선인양 조장하는 드라마가 넘쳐나고 있다.
그 친구의 진솔한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 있다면 그렇게 선량하고 평생을 부인을 위하여 험한 일 가리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한 그 烈夫를, 그렇게 일생을 마치게 해도 되는 것인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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