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 머 님
맏손자인 나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지극하셨다.
친척대소사나 기차타고 밀양에 사는 고모 댁에 갈 때도 할머님은 언제나 나를 앞세우셨다. 집안의 대들보인양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항상 바쁜 어머니 사랑을 느끼볼 수 없었던 내게 할머니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어머님은 할머님과 모두 남자뿐인 열 식구를 돌보시느라 쉴 틈이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식사준비를 하고 낮에는 들일, 밤에는 보리방아로 일에 묻혀 사셨다. 밤새워 빨래와 다림이질을 하느라 주무시는 것을 본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자식 여섯은 제대로 돌볼 틈이 없으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돌보는 것은 할머니 담당이었고, 장손인 나는 할머니 사랑 속에서 자랐던 것이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던 할머님이 나의 중학교 진학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셨다. 장손은 가업인 농사를 이어야 한다면서 진학을 못하게 하신 것이다. 할머님 말씀에 자식들에게 무척이나 엄하셨던 아버님마저도 어찌하지 못 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집안 형편도 넉넉치 못 했던 터라 나도 이렇다 할 진학명분을 찾지 못 했다.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으시고 벼슬 없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머님은 3남 4녀를 힘들고 어렵게 키우셨다.
할머니는 집안일에 무심한 한학자이셨던 할아버지로 인해 장손인 나를 공부보다는 家業인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 한 맺힌 결심이었으니 나는 중학교 진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큰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진학을 포기했지만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중학교 통신교재로 밤새워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매일 새벽 뒷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낮에는 희망도 없는 농사일을 열심히 했다. 그렇게 3년간 두메산골에서 고된 일과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치솟는 향학열을 억제할 수 없어 궁리궁리 끝에 결단을 내렸다.
할머님을 간접적이고 감동적으로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6.25 전쟁 중이라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테마가 있었다. 그때는 유랑극장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는데, 진학하지 않으면 전쟁에 나가서 죽을 수도 있다는 내용을 연극으로 할머님께 보여드리기로 한 것이다.
당시 고등학생 이상과 공무원은 군에 보류되는 등 군에 가지 않았다. 학식이 있으면 후방에 행정병으로 복무함으로서 戰死傷을 입을 위험이 없었다.
할머님께 나를 공부시키면 군 입대가 보류되거나 전투병복무는 면할 수 있으므로 전사하는 불행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로 했다. 그러면 지극히 사랑하는 장손인 나를 공부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6살 또래, 초등학교 졸업동기 및 선후배 10여명이 1953년 추석에 연극을 하기로 하고 시골의 바쁜 농사일에 틈틈이 연습을 했다.
연극의 초점은 초등학교 동기인 삼돌이와 중학교까지 나온 철수가 전쟁으로 인한 생사운명이 갈리는 애달픈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할머님의 심정을 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몇 친구들은 그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문화의 불모지인 시골 동네에 추석을 뜻있게 보내자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연극 후 내 뜻을 이해해 주어 고마웠지만 지금도 친구들을 속인 내 마음의 빚을 지울 수가 없다.
연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학교를 졸업한 철수가 면서기가 되어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 면서기 철수가 초등학교만 나온 삼돌이에게 징집영장을 전해 준다. 입대한 삼돌이는 낙동강까지 후퇴한 치열한 6. 25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대구 국군병원에 후송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하나뿐인 삼돌이 누이동생인 순이가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 간호병으로 지원입대 한다. 그러나 얄밉게도 그들 남매는 만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완치된 삼돌이는 최전방 전투에 다시 투입되었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그만 장열하게 전사 하고 만다,
삼돌이의 전사통지서 역시 동기인 면서기 철수를 통해 전해 받는 순이의 애절한 슬픔과 철수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연극이었다. 제목도 “동기가 전한 전사통지서”였다.
그러나 추석을 13일 앞두고 내가 그토록 보여드리기를 원했던 할머님이 오래 앓치도 않으시고 음력 8월 2일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로 인해 연극을 하느냐 마느냐 논의가 많았고 나는 할머님이 안계시니 연극이 필요없는 허탈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친구들의 따뜻한 격려로 할머님장례와 삼우제를 지내고 다시 연극연습은 계속되었다.
추석 다음날 심심산골 시골동네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동네 주민과 추석에 오신 일가친척 등 손님을 모시고 딱총화약 냄새를 풍기며 연극은 시작되었다.
연극은 동네사람들과 내빈을 울리기에 충분하였고 이웃동네까지 가서 연극을 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다.
그로 인해 부모님과 일가친척은 물론 특히 나를 사랑하시는 이모님, 고모님은 눈물 꽤나 흘리셨다. 모두가 할머님이 살아 계셨어도 나를 공부시킬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공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학한 나는 고학과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악착같이 주어진 일은 정성을 다하며 기금까지 살아왔다.
할머님의 간절한 염원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라 믿었다. 집안과 부모형제들을 생각하며 대학을 온갓 고생을 하면서 어렵게 졸업하였다. 그리고 중앙 6개부처를 거치며 공직에 30년을 근무하면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과 할머님을 잊지 않고 국가를 위하여 성실히 봉사하였다. 할머님의 뜻인 家業을 잇지는 못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할머니님의 뜻에 따르리라 생각하며 살았다.
하늘에서 할머님이 돌봐주신 덕분인지 내가하는 모든 일이 거의 내 뜻대로 되었다.
나로 인해 동생 세 명 모두 기술전문기사, 고위공무원, 대학교수가 되는 동기가 된 것도, 그토록 장손을 끔찍히 사랑하신 할머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덕이란 생각이 든다.
그토록 사랑하는 장손의 소원을 들어 주지 못한 할머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렸을까.
그로 인해 가슴알이 병이 나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은 아니실까.
할머님이 그 연극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하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철없고 겁 없는 시절이었다.
할머님 산소에 가면 지나간 넋두리와 하소연을 해 보지만 아무 말씀 없으시니
더욱 할머님 생각이 애절하다.
성남문학 제36집 (2012년) 462면 게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