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 때 경제전쟁은 시작되었다(2)
- 산업스파이를 막아라 -
김종길
내가 대기업에 재취업한 1990년도는 국제적으로 군사냉전체제는 무너지고 경제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가 무너지면서 세계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정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급변하고 있었다. 세계는 새로운 경제 질서인 하나의 무역시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고, 다국적 기업 간의 무한경쟁, 즉 새로운 경제전쟁은 필연적이었다.
특히 우리기업들은 남북대치라는 세계유일의 군사적인 긴장상태와 정부의 보호아래 온실안 화초같이 자란 기업이 세계적인 거대기업들과 경제전쟁을 치려야 하는 양면의 위협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기업이 생산하는 중요물품은 정부가 해외수입을 제한하고 있었으므로 국산제품은 물자공급이 부족하여 없어서 못 파는 시대였다. 따라서 국내 기업 간에도 경쟁을 해본 경험이 없었으니, 군인이 총도 제대로 솔 줄 모르면서 전쟁터에 나가는 신병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당시 우리기업들은 경제전쟁이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할 능력도 일부 대기업외는 사실상 없는 실정이었다.
나는 다행히 상공부에 근무하면서 실물경제를 익혔고, 국가안전보장회의에 근무한 덕분에 군사전쟁과 경제전쟁의 실상을 예측할 수 있는 기본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전쟁은 국가가 주도하지만 경제전쟁은 기업이 주도한다.
군사전쟁은 무기를 사용하지만 경제전쟁은 제품과 서비스로 승부한다.
군사전쟁은 전쟁터가 한정되어 있으나 경제전쟁은 전 세계가 전쟁터다.
군사전쟁은 살상과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만 경제전쟁은 고객의 만족도로 승부한다.
군사전쟁은 시작과 끝이 있지만 경제전쟁은 인류의 욕구가 높아가는 한 영원하다
군사전쟁은 인류의 파멸을 자초하지만 경제전쟁은 인류의 발전과 행복을 높여준다.
이렇게 군사전쟁과 경제전쟁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는 군사전쟁은 파괴와 살상, 점령이라는 수단이지만 경제전쟁의 승패변수는 아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고객이 요구하는 제품의 기술. 품질, 기능, 디자인 등 품질에 대한 경쟁이다, 뿐만 아니라 경영전략, 경영기법, 경영자의 능력, 영업조직, 판매기법, 사후관리 등 기업의 경영능력과 고객의 국적, 종교, 문화, 풍습, 취향 등 고객의 감성적이고 정서적특성도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경제전쟁은 인간의 욕구수준이 높아지는 한 영원히 계속된다. 또한 경제전쟁이 치열 할수록 고객 즉, 인류의 문화는 발전하고 삶의 질과 개인의 행복지수도 높아짐으로 경제전쟁은 영원할 수밖에 없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군사전쟁이든 경제전쟁이든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다 이길 수 있다는, 즉 知彼知己 百戰百勝”의 손자병법이 만고불변의 진리다. 적을 알기위하여서는 스파이이가 필요악이 듯이 승패요인이 많은 경제전쟁에 산업스파이의 성행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산업스파이 방어전략도 그만큼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는 산업스파이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정부도 기업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정치경제적으로 패권을 가진 미국이 실리적으로 많은 나라를 상대로하여 기존 특허와 저작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영업비밀(Know How)보호를 포함한 지적재산권강화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UR협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또한 개별국가인 우리나라를 상대로 1986년 한미통상장관회의에서 영업비밀보호를 포함한 지적재산권보호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Know How보호조항을 신설한 부정경쟁방지법을 1992년 12월에 시행하게 되었다. Know How보호는 기업이 첨예한 국제간 경쟁에서 기업자신을 보호함은 물론, 실수로 다른 기업의 Know How를 침해하는 경우에도 손해배상과 기업이미지 실추 등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는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산업스파이의 표적인 영업비밀보호업무가 기업의 중요한 핵심업무가 될 가능성이 많은 당면 과제가 되었다.
내가 재취업을 하면서 맡은 업무는 임직원들의 예비군 업무와 민방위업무, 그리고 첨예한 남북한 군사 대치상태에서 전시가 되면 기업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해야 할 전시준비 업무였다. 기업본연의 생산과 판매업무가 아니었고, 선진국기업은 하지 않는 특수업무였다. 그러므로 다국적기업과의 치열한 경제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과 전시를 대비한 특수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내가 기업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공직에서 전시대비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가비밀을 보호한 경험이 경제전쟁의 현장에서 Know How보호, 즉 산업스파이방어업무에 최적임자라는 전제하에 경영자의 지시나 요구도 없이 내 스스로 그 업무를 담당하기로 결심하였다.
따라서 기업의 정보보호업무에 대한 각종 관련서적과 자료 및 산업스파이 사건사례를 수집하였다. 또한 Know How보호가 이슈가 된 당시에 관련단체와 학회도 수시로 교육과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적극적으로 참석해본 결과 그들은 중요성과 외국의 법제해설 및 보호의 당위성만 설명할 할 뿐이었다. 비밀을 취급한 경험이 없으니 기업이 필요한 Know How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산업스파이방어방법과 절차를 알려 줄 지식이 없음은 당연하였다. 나는 10수년을 국가비밀보호업무를 수행한 경험을 원용하여 규정과 지침을 만들고 정보수집과 산업스파이방어체계를 나 스스로 수립하였다.
당시 나의 소관 업무인 민방위와 예비군 연합대의 운영은 한화빌딩 건물주인 우리 회사의 소관이었다. 우리 회사 사장은 건물에 입주한 한국화약, 한국종합기계, 한화무역, 한화콘도 등 계열사를 통합한 연합예비군과 민방위대를 주관하는 대장이었다. 훈련 때는 우리 회사 사장이 통합민방위대장과 예비군교육에 참석하여 인사말 또는 격려를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참석한 예도 없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훈련이 있을 때마다 인사말과 소양교육은 언제나 연합대 부대장인 내 차지였다. 그룹 계열사 연합민방위대원 3~4백 명을 수있는 기회와 그 많은 직원을 상대로 소양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그래서 상공부 근무한 실무경력과 국제적인 개방경제에 대한 감각을 기반으로한 기업이 당면한 Know How보호가 앞으로 기업의 생존전략임을 소양교육을 통해 역설하였다. 그 결과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현실적인 문제였음으로 대원들이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그로인해 당시 한화 그룹방송인 HBS(Hanhwa Broadcasting system)에 아침 정규방송에 Know How 보호에 대한 수회에 걸쳐 전 계열사에 방송강의도 하였다. 따라서 기업비밀보호규정의 제정과 업무추진계획은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 결재자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당시 한화석유화학은 본사와 울산1. 2공장. 진해. 여수. 군산. 부강공장 및 대전연구소등 8개 사업장이었다. 이들 사업장의 Know How취급 핵심요원들을 한화콘도에 1박2일 소집교육을 실시하였고, 전사업장 직원을 대상으로 순회교육 및 매년 순회지도감사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업 중 한화석유화학이 기업비밀보호체제를 확립하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 부하 직원이었던 남궁 이병이 아무도 하기 싫어하고, 가장 한직인 병기계를 자원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인기부서로 만든 전례를 지금도 내 인생에 중요한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는 미군사병들의 개인 소총을 일일이 청소해주고 미군이 오면 “이제부터 총기 청소는 내가 대신해 주겠다”고 돌려보냈다. 대신 미군들이 봉급날이 되면 남궁이병에게 줄 선물을 사들고 오는 미군병사가 병기계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
나도 기업이 해야할 새로운 업무를 개척하였고 최선을 다해 기여하였다. 그 후 1994년에 “기업비밀보호”라는 책을 발간할 때 회사가 발간 비 절반이 훨씬 넘는 4백만 원을 지원 받았고, 책 400권을 8개사업장 전 부서에 배부하는 혜택도 누렸다. 정년퇴직할 때는 그 책을 수정 보완한 "기업비밀보호전략: 부제 한국은 산업스파이 天國"는 책을 발간시판하였다. 기업에서 제일 한직인 부서를 제일 역동적인 부서를 만들었고 1997년 1월말에 정년퇴임하였다. 기업에 퇴직 후 새로운 분야인 산업스파이방어 전문 한국산업보안연구소(원)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첨단기술보호와 경찰청의 산업스파이 색출에 기여하였다고 자부한다.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격동기에 제2의 인생을 몸 담았던 기업을 위해 내 스스로 새로운 이슈업무를 개척하고 최선을 다 했으며, 그 경험이 제3의 인생 60세에 개인연구소를 개설하였고, 사단법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경찰청외사국. 계룡대(육.해공). CEO 초찬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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