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를 막아라 (1)
-산업보안연구소 개설과 창업- 김종길
1997년1월 한화그룹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이미 준비하고 있던 불루오션(Blue Ocean)사업인 기업체의 첨단기술외국유출을 막는 산업스파이방어 사업을 시작하였다. 강남역 근처에 동경빌딩에 ‘한국산업보안연구소‘를 개설하고 기업체 보안담당자들의 직무수행능력을 높이는 모집교육과 기업체 마인드 조성을 위한 출강을 시작하였다. 한화그룹에 근무하면서 이미 “기업비밀보호전략 : 부제 한국은 산업스파이 天國”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 책 출판과정에서 출판사 사장은 시기적절한 책이라며 호기 있게 발간을 자청하드니 마지막 단계에서, 자기는 시판도서를 발간한 경험이 없으므로 출간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전에 서면계약도 없었으니 책을 자비로 출판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을지서적에 총판을 위탁하였으나 도서유통체계를 알지 못하였기에 출판비 회수를 할 수 없어 연구소 개설준비 과정부터 돌부리에 채인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29일 역삼동에 있는 한국과학기술회관 지하 300석의 대 강당에서 연구소 개소기념 ‘기업비밀보호전략 : 산업스파이 방어전략’ 무료 공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 때도 200명이상이 참석하여 반응도 좋았고 발간도서를 150권이상을 판매하면서 사업을 시작하었다.
시장조사와 벤치마킹 차원에서 정년퇴임 직전 1996년 11월에 국가정보원 부설 교육원에서 기업체를 대상으로 개설한 제2기 산업보안실무교육에 참가해 보았다. 내가 연구소를 개설한다면 유리한 것은 기업현장에서 업무수행경험이 있다는 점과 발간한 서적에 구체적으로 업무수행절차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와 별도로 교재도 준비되어 있어 사업성이 충분히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당시 국가정보원에서 교육을 받은 동기들에게 발간한 책을 한 권씩 기증했더니 호응이 아주 좋았다. 교육을 같이 받은 포항제철과 현대조선 직원은 그 후 연구소의 직원모집교육에 본인이 참가함은 물론 회사의 관계자를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참가시켜 주었다.
우연의 일치로 연구소 개설과 동시에 창간된 Security World 사의 월간 “시큐리티 월드”에 나는 매월 ‘산업보안관리 실무’를 3년간 계속 연재하기도 하였다.
매월 원고마감일이 부담스러워 그만 두겠다면, 사장이 직접 사정할 정도였고, 그 꼭지가 상당한 인기가 있어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잡지는 매월 받아보고 있다. 당시는 산업스파이 사건이 수시로 신문과 TV에 보도되었고, 사건이 일어나면 매스컴은 천문학적인 국부(國富)가 손실되었다는 다소 과장되고 자극적인 보도를 하곤 했었다. 당시 그 분야에 활동하는 민간인이 없었음으로 사건이 나면 신문과 TV 등 매스컴에 하루에 두 세군데 등장하여 마지막 멘트를 하는 등 그 분야에 인지도도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고객확보 전망도, 공직에 마지막 근무하던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기획위원회에서 분기마다 실시하는, 대기업에 근무할 신임비상계획관 교육을 5년간 한화그룹에 근무하면서 계속 출강하였다. 이들은 거의가 기업에서 보안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잠재고객도 이들이 근무하는 500여개 이상의 대기업이 될 수 있었으므로 고객 확보도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연구소 개설 초기 모집교육에는 포항제철, 삼성그룹, LG그룹, 현대그룹, KT 등 대기업들의 각 사업장 보안담당자와 국영 한국전자연구소, 원자력연구소, 항공우주연구소 등 굴지의 연구소의 보안담당자들이 모집교육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연구소운영을 위하여 30명 이상 참가하여야 현상유지가 가능했으나 매번 20명 정도가 참가하므로 겨우 교육행사비를 충당할 정도였다. 더구나 그해 1997년 IMF라는 대 재앙이 불어닥쳤다. 기업들이 생산판매와 직접관계가 적은 연구직을 퇴출시키고, 교육예산을 삭감함으로서 모집교육과 기업출강이 감소되는 등 연구소 운영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렇다고 그만 둘 수도 없는 것은, 비록 개인연구소지만 국내굴지의 대기업체 직원들이 교육에 참가하고 있었고, 출강도 대기업이 주 고객이었다. 평생 사업으로 시작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보람 있는 사업이었다. 어설픈 국가관에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이해타산에 연연하여 그만두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당시는 지금 같이 정부의 지식산업에 대한 지원도 없었다.
당시 국가안위에 주력해야할 국가정보원이 민주화에 부정적 이미지를 씻기 위하여 산업보안에 초점을 맞추고 산업스파이 방어에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였고, 그 이외 정부부처는 관심도 없었다.
연구소 개소 5년을 버틴 후인 2002년 과학기술부에서 ‘과학기술정보 보호체제 강화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참가자 모집을 공고하였으나 신청자가 없었고, 나 또한 몰랐다.
담당자가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 우리연구소가 적격이라며, 용역에 참가할 것을 권유함으로 정부용역을 처음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2003년에는 정보통신부에서 ‘IT기술해외유출방지대책’이란 연구용역을 맡아 수행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국내 유일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소 운영에 어려움은 면할 수가 없었다. 오랜 공직생활에서 몸에 밴 국가관과 우리나라 첨단기술이 해외 유출이 계속되고 있음이 안타까왔다. 그리고 대기업 임직원들이 교육에 계속 참가하는 실정인데 개인의 이해타산만을 따져 산업스파이방어 사업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개인연구소를 10년간 버티어오다가 기업들의 인식이 높아갈 무렵, 2007년 산업보안 분야 관심이 있고, 정보통신보안의 태두이시고 동국대 이재우 석좌교수, 경제학박사 겸 변리사, 국회의원, 변호사, 등 10여명의 이사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산업보안연구원”으로 확대 발족하였다. 1년 반을 운영하다 새로 시행된 산업기술보호법에 근거를 둔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가 설립되면서, 그 협회와 통합을 하고 그 협회 고문직으로 있기도 했다.
어떻던 연구소운영은 내 자존감에 상처를 주었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너무 시대에 앞서 갔다는 것과 사전 준비를 하였음에도 판단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 못한 IMF로 기업에 최악의 어려운 시기가 겹쳤고, 국가안보회의에 출강함으로 알게 된 기업체보안을 담당하는 비상계획관 500여명을 우호적인 고객으로 판단한 것이 나만의 짝사랑이었다. 이분들은 근무기간이 5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기업에 애정이나 성실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착각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산업보안교육과 업무에 적극적이었고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몇몇 분은 학문적으로 정진하여 박사학위를 받는가 하면, 산업보안이 보편화된 지금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분도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앞서가다 돌부리에 넘어지고, 가시밭길을 걷기도하며, 재정적으로도 고통스러웠기에 결과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한 때는 하루에 매스컴에 두세 곳에 출연하기도 하였고, 경찰청 외사과와 보안과의 직원교육과 전국순회 출강봉사로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다. 보안의 원조인 국가기무학교의 직원과 방위산업체 직원 및 계룡대(육·해·공군본부)에 출강도 했다.
내가 재직할 때는 받지 못했던 산업통상부장관의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인터넷의 유명포털사이트에 연구소와 내 이름을 치면 서너 장 이상으로 도배할 때도 있었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6~70대 이후 노년에 국가와 기업의 산업보안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하면서 노력한 열정과 보람으로 지금도 아무런 후회는 없다.
경찰청 외사국(2006.8.286). 계룔대(육해공본부). 루네상스호텔 조찬특강
2007. 9. 구미IT기업 글로벌화 좌담회
콘틴넨털호텔 공개특강(200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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